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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불화장 권영관 선생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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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20.02.05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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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화(佛畵)는 불교의 종교적 이념을 표현한 그림으로 그 제작 형태에 따라 거는 그림인 탱화(幀畵)와 주로 종이에 그리는 경화(經畵), 그리고 벽에 그리는 벽화(壁畵)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불화 제작을 담당하는 장인을 금어(金魚)·화승(畵僧)·화사(畵師)·화원(畵員)이라 부르기도 한다. 불화를 그리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하루 종일 왼손을 괴고 엎드려 작업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어질 정도로 힘든 작업이지만 권영관(權榮寬) 선생은 벌써 40여 년째 이 작업을 계속해 오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이지만 선생은 변함없이 불화 그리기에 몰두하고 있다.56ee36d09a3ead2f6eac059705a97382_1580876461_9091.jpg

선생의 불화 작품은 우리 주변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부산 범어사(梵魚寺)와 삼광사(三光寺), 충북 단양의 구인사(救仁寺), 전북의 금산사(金山寺), 경북 봉화의 축서사(鷲棲寺) 등 전국의 주요 사찰은 물론 미국, 일본 등 국외까지 약 350여 점이 봉안되어 있다. 선생은 지난 2008년에 부산광역시 무형 문화재 제15호 불화장(佛畵匠)으로 지정되었다. 불화장이란 불교 교리를 알기 쉽게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예배용·교화용 불화[탱화]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제작하는 장인(匠人)을 말한다.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불화장으로 자리하기까지의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자.

불화와 함께한 인생

부산광역시 무형 문화재 제15호 불화장 기능 보유자인 권영관 선생은 1952년에 부산시 북구 구포동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조부[용성 스님]와 부친[권정두]에 이어 불화 그리는 일을 가업으로 이어 오고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무척 좋아했다. 그러나 지금과 달리 그때만 해도 그림 그린다, 음악 한다 하면 시쳇말로 빌어먹는다고 하던 시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시절 한국인의 삶은 팍팍했다. 1945년 광복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일어난 6·25 전쟁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어수선했고, 한국 경제는 피폐했다. 그만큼 먹고 살기도 힘들었다. 당장 눈앞에 먹고사는 문제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으니, 그 시절 이른바 예술이란 사치요, 배고픔을 해결하는 데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상황은 불화계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당시 불화를 그리는 데 사용하는 재료나 환경, 모든 것이 열악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버지는 그가 그림 그리는 것을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림 그리는 것이 좋았다. 아버지는 그런 그를 마뜩잖게 여겨 야단을 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당신을 닮아 그림 그리기 좋아하고 소질도 있는 아들이 기특했을 것이다. 다만 당신이 한평생 걸어왔던 길이기에 누구보다도 그 길이 험난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모든 부모의 마음이 그러하듯 그처럼 어렵고 고생스러운 길을 가려는 아들이 못내 안쓰러워 만류했던 것이리라.

아버지의 바람대로 그냥 좋은 것으로 그치면 좋았겠지만 그는 그림을 계속 그리고 싶었고, 또 아버지나 숙부를 따라 흉내도 내고 싶었다. 그토록 좋아했던 그림이지만 불화가 그의 삶이 되어 버릴 줄은 그도 몰랐다.

‘그럼 니가 한번 그리 봐라’

그때 그는 그림이 너무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한때 그는 만화 그리기에 몰두하기도 했는데, 그 당시 집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이웃하며 살던 아버지와 숙부는 두 집 사이에 있던 산에 굴을 뚫고 발전기를 돌렸다. 해가 떨어지면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일으켰고, 밤 열한 시나 열두 시가 되면 발전기를 껐다. 아버지의 꾸지람을 피하기 위해 그는 밤늦게 불이 꺼지고 식구들이 모두 잠자리에 들면 홀로 골방에 들어가서 촛불을 켜고 만화를 그리곤 했다. 노트를 산다며 부모님을 속여 산 종이에 만화 속 인물을 그려 넣기도 하고, 때로는 직접 스토리를 덧붙이기도 했다. 그렇게 완성된 만화를 풀로 붙이거나 송곳 등으로 구멍을 뚫어서 책으로 만들기도 했다. 누구에게 배운 적은 없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다 보니 제법 그럴듯한 만화책이 만들어졌다.

“무슨 일이든 억지로 시켜서는 안 되는 것 같아요. 스스로 좋아하고 즐겨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재미있던 만화 그리기가 시들해졌다. 그제야 아버지가 그리는 불화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부친이 그리는 그림을 보니까, 내가 볼 때는 똑같은 걸 반복해서 그리는 거 같아요. 내 딴에는 많이 참았죠. 그러다가 참다못해 경상도 말로, ‘아버지 이걸 그림이라고 그리요?’라고 하니까 아무 말씀도 안 하시더니 ‘그럼 니가 한번 그리 봐라’고 하셨지요.”

정성과 혼이 담긴 불화

처음에는 별거 아니라 생각하고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해 보니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하루 종일 엎드려서 그림을 그리다 보면 어깨부터 다리까지 온몸이 쑤시고 아파 왔다.

“정식으로 해 보니까 어려워요. 그렇지만 어렵다고 포기해 버리면 안 되겠죠. 이걸 아버지도 하는데, 그런 생각을 많이 했죠. 어떻게 보면 흉내를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남들이 보면 똑같다고 하는데 제가 보면 아니니까. 그렇게 조금씩 노력하다 보니 실력도 늘고 그렇게 된 것 같아요.”

고행에 가까운 웅크린 자세로 40년 이상 불화를 그린 그의 발등에는 세월의 깊이만큼이나 단단한 굳은살이 박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힘든 점이라면 작업하는 동안 모든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불화는 일반 회화와는 다르다. 불화는 회화 기술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성과 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 누구보다도 이 점을 잘 알고 있기에 그는 붓놀림 하나라도 허투루 할 수 없다고 한다. 불화 그리기에 집중하다 보면 때로는 말 한마디 내뱉을 힘조차 없을 정도로 체력 소모가 심하다. 그럴 때면 그는 아버지를 떠올리게 된다. 하면 할수록 아버지가 해 왔던 이 일이 웬만한 장인 정신이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작업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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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로부터 이어진 불모 가계

권 선생의 할아버지는 포항 보경사(寶鏡寺) 주지를 지낸 용성[본명 권재순] 스님이다. 권 선생의 아버지가 열대여섯 살쯤 되던 해, 포항 보경사 주지였던 할아버지는 경주 기림사(祇林寺)의 부주지를 맡아 달라는 기림사 주지의 부탁을 받고 기림사 근처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당시는 기림사가 본사이고 불국사(佛國寺)가 말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부터 아이[권 선생의 부친]가 보이지 않았다. 하루 종일 보이지 않던 아이는 저녁때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아버지가 어딜 갔었냐고 물어도 아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튿날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는 아침부터 사라졌다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나타났다. 그렇게 사흘이 반복되었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아이의 아버지는 나흘째 되던 날, 아들의 뒤를 조심조심 따라갔다.

아들이 도착한 곳은 기림사의 건칠불[건칠 보살 좌상]이 모셔져 있던 전각이었다. 아이는 법당에 하루 종일 쪼그리고 앉아 건칠불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모른 척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흐른 후, 아이는 산에 가서 바위와 바위틈에서 나오는 찰흙[경상도 말로는 쫀득하다고 해서 쫀대흙이라고도 한다]을 파 와 일주일 동안 관찰한 건칠불을 그대로 만들어 냈다. 당신이 가르칠 재목이 아님을 짐작한 아버지는 불상을 완호 스님에게 보여 주고는 아들을 부탁했다고 한다.

“할아버지께서 완호 스님을 잘 아니까, 건칠불을 보여 주면서 우리 아들이 한 건데 스님이 좀 가르쳐 주실 수 없겠냐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인연이 된 거죠. 그래서 보통 완호 스님-권정두-숙부님 이렇게 내려오지만, 어떤 경우에는 할아버지 이름이 들어가기도 하는데 그런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당시 완호 스님은 영도 복천사(福泉寺)에 불화소(佛畵所)[불화를 그리는 화사를 양성하는 곳]를 열어 후학을 양성하고 있었다. 그렇게 권 선생의 부친 권정두 선생은 완호 스님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불화 그리는 아버지를 보며 성장하다

권 선생의 할아버지는 주지를 하면서 불상과 불화 제작에도 참여했다. 그런 할아버지의 재능을 권 선생의 아버지와 숙부들이 고스란히 물려받았다고 한다. 권 선생의 부친인 권정두 선생을 비롯해 정학, 정진, 정환 숙부들도 할아버지와 같은 길을 걸었다. 아버지와 숙부는 모두 완호 양낙현 스님에게서 불화를 배운 완호 스님의 제자였다. 따지고 보면 권 선생이 불화와 인연을 맺은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려서부터 그는 아버지와 숙부들의 불화 조성 작업을 곁에서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타고난 재능도 있었지만 그가 자란 환경은 불화를 자연스럽게 접하도록 해 줬다. 특별한 놀이 도구가 없던 시절, 그는 틈만 나면 아버지 곁에 쪼그려 앉아 아버지의 작업을 구경하곤 했다.

그가 초등학교 때의 일이다. 어느 날 한 청년이 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우러 왔다. 초등학생인 그의 눈에 비친 나이 스물서너 살의 청년은 굉장히 커 보이는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청년이 그린 그림이 초등학생인 자신의 눈에도 형편없어 보였다.

“어린 마음에 ‘저걸 그림이라고 그렸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인제 건방스럽게 혼자서 종이를 딱 펴 놓고 그렸지요.”

청년의 그림에 자신만만해진 그는 초안도 잡지 않은 채 붓을 잡고 생전 그려 보지도 않았던 그림을 바로 그려 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의 그림을 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도 아들의 솜씨가 그저 좋은 솜씨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이따금씩 조각실로 그를 불렀다. 그리고는 당신이 조각해 놓은 불상에 대해 어느 부분이 잘못 되었는지 물어보곤 했다. 그의 아버지는 작업을 할 때는 굉장히 엄격했지만 평소에는 매우 온화한 사람이었다.

“한 번씩 부친이 골방 같은 조각실로 저를 불러 놓고는 조각해 놓은 거를 보이시면서 결점이 무엇인지 찾아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쪽 눈이 어떤 것 같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니 눈에도 그래 보이나?’ 그러셨습니다. 그리고 제게는 아무 말씀도 안 하시다가, 그때 제가 막내라 부모님과 같은 방에서 잤는데, 잠자리에서 아버지가 어머니께 ‘보통 눈이 아니다. 저런 거 다 찝어 내는 거 보면……’ 이렇게 이야기하시곤 했습니다.”

불교 미술 대전 수상의 영광

사실 권 선생의 가계는 유명한 불모(佛母)[불화를 그리거나 불탑 등을 그리는 사람에 대한 존칭] 집안이다. 할아버지 용성 스님으로부터 아버지와 숙부, 그리고 자신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불모 집안이다. 대한불교 조계종에서 주최한 불교 미술 대전에서 1회 때는 이미 돌아가신 큰 숙부가 대상을, 3·4회 때는 막내 숙부가 대상을 받았다. 특히 불교 미술 대전 3·4회에서 그는 숙부와의 경합 끝에 최고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5회 때는 그가 대상을 차지했다. 1회부터 5회까지 한 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의 집안에서 대상을 차지한 것이다.

“숙부와 경합을 벌인다는 것 자체가 어린 나이에 제가 생각하기에는 거북하고 안쓰러웠죠. 저야 당연히 숙부님이 받으셔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구요.”

전국의 쟁쟁한 화사들을 제치고 당시 스물두 살의 그가 불교 미술 대전에서 대상을 받자 유학을 보내 주겠다는 제의도 있었다.

“그 당시 제가 나이가 어리고 하니까 모친이 따라 올라오셨는데, 대상을 받고 나니까 한 스님이 좀 보자고 하시면서 권영관을 자신에게 맡기면 외국 유학도 시켜 주겠다고 하셨나 봐요.”

지금이야 돈만 있으면 유학을 가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외국에 나가는 것 자체가 특권층이 아니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만을 생각할 수 없었던 그는 이런저런 이유로 유학을 포기했다.

“그 당시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얼마 안 되었고, 형님이 개인 사업을 하다가 좀 힘들어진 것도 있었고. 또 제가 그냥 가 버리면 가족들 생활하기가 힘든 것도 있고, 그래서 못 가게 되었죠.”

천연 채색을 고집하는 이유

힘이 안 드는 불화 작품은 없다. 불화 한 점 그리는 데 짧게는 2년, 보통 3~4년이 걸린다고 한다. 이렇게 한 작품 한 작품이 모두 심혈을 기울인 그의 정성 속에서 탄생한다. 특히 석채(石彩) 작품을 시작하고부터 힘은 더 들고 생활은 오히려 더 나빠졌다. 사정이 이러할지라도 석채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아무리 정성을 쏟은 작품이라 할지라도 내구성이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면 그만큼 불화의 의미가 퇴색되기 때문이다.

석채로 채색한 고려 불화는 천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도 막 채색한 것처럼 고운 빛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20여 년 전 서울에서 열린 한 전시회에서 일본이 소장하고 있던 고려 불화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 뒤로 그는 천연 석채를 구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발품을 팔고 있다. 애초에 불화 그리는 일을 돈 버는 수단으로 생각했다면 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몇 년씩 공을 들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일부 사람들처럼 화학 안료를 이용해 대충대충 불화 흉내만 낼 수도 있다. 그러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작품을 할 수 있고, 또 지금보다 훨씬 잘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양심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한평생을 그렇게 살아오다 보니 이제는 습(習)이 배여 함부로 하려고 해도 함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불교에서는 ‘습’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함부로 하려고 해도 함부로 안 돼요. 할 수가 없죠. 찜찜하죠. 처음에 한 번 잘못하면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만 그게 한 번, 두 번 반복되다 보면 다들 그렇게 하는데 싶고. 자신을 정당화하게 되는 거죠. 근데 그것마저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거죠.”

그도 석채 작품을 시작하면서 물질적으로 더 힘들어졌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지금의 상황에 만족하는 편이다.

“물질이란 많이 가질수록 편하고 좋은 거는 사실인데, 많이 가질수록 사람을 나태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조금은 긴장할 수 있는 이런 상태가 좋은 것 같아요. 지금까지 작업해 오면서 가족들 굶기지는 않았고, 아들 하나 딸 하나 있는 거 교육은 시켰으니 이것으로 만족합니다. 지족(知足)하는 마음이라고 하죠. 스스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해요.”

수행하는 마음가짐

그는 보통 새벽 다섯 시, 늦어도 여섯 시에는 일어나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평소에는 일어나 그날 할 일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고 간단하게 아침을 먹는다. 그리고 나면 작업 준비에 들어가서 여덟 시 반에서 아홉 시쯤부터는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한다. 오후 한 시쯤 돼서 점심을 먹고 잠깐 쉬고 난 후, 두 시부터 시작하는 오후 작업은 저녁 일곱 시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가끔 시간에 쫓기다 보면, 새벽부터 시작된 작업은 밤늦게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요즘 그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일곱 시 반까지 작업한 후 아침 식사를 한다. 불화를 의뢰한 측의 일정에 맞추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한다. 그렇게 아침 먹기 전부터 시작된 그의 작업은 밤늦도록까지 계속된다. 잠시 쉴 틈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고된 작업인데 올 여름 폭염까지 더해져 그는 최근 체중이 7~8㎏이나 빠졌다고 한다. 수행하는 마음가짐이 아니라면 해내기 힘든 작업임에 틀림없다. 젊은 시절, 그는 불화 그리는 일을 고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때는 그저 그림 그리는 것이 좋았다. 고되어도 고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영도 영화사의 너비 6m 30㎝, 높이 3m 20㎝에 달하는 삼세 후불탱화는 완성하는 데만 몇 년이 걸렸습니다. 당시 영화사 노스님의 배려로 시간에 쫓기지 않고 작업할 수 있었는데 감사하게 생각하죠.”

아무리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라 해도 시간에 쫓기다 보면 때로는 석채를 고집하는 자신에 대한 회의가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에게 불화를 부탁해 오는 사람들의 진심을 알게 되면 붓 손질 한 번, 선 하나 허투루 할 수 없다고 한다.

석채 구하기 위해 전국 산천을 누비다

그는 석채를 고집한다. 석채를 글자 그대로 풀면 돌 석(石) 자에 채색 채(彩) 자다. 즉 색깔 있는 돌을 석채라고 일컫는다. 사실, 요즘 사람들은 석채라고 부르지만 천연 채색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에메랄드, 루비, 사파이어 같은 보석을 떠올리면 된다. 보석은 원석을 연마해서 만들어지는 데 원래 원석 그 자체는 한낱 돌일 뿐이다. 보석이 가치를 가지는 이유는 불변하는 속성 때문이다. 이처럼 천연 채색은 자연에서 찾을 수 있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안료로 색을 칠하는 것을 말한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일반적인 화학 안료는 그냥 접착제를 타서 칠하면 그만이다. 이처럼 색을 칠하기가 비교적 쉬운 화학 안료를 사용하더라도 매우 섬세한 작업의 경우 힘이 들게 마련인데, 하물며 보석 가루로 색을 칠하는 수고는 말해 무엇하랴.

“돌마다 성격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입자가 미립으로 갈수록 색이 옅어져요. 그런데 이런 보석이 가지고 있는 색깔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입자 크기가 있습니다. 그 기본적인 크기를 유지해 줘야 원석 색깔과 비슷한 색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채색의 경우, 붉은색에 흰색을 타면 중간색인 분홍색이 되지요. 그러나 석채는 그렇지 않습니다. 입자별로 최소 크기의 원석 색깔을 가지고 있는 입자가 원색이라면, 그걸 조금 더 갈면 중간색이 되는 것이죠. 원석을 갈면 갈수록 색은 점점 더 옅어지는 거죠.”

그는 전국 산천에서 구해 온 원석을 먼저 쇠 절구통에 넣고 빻아 가루를 낸 후 공업용 체로 걸러서 물감으로 사용하고 있다. 원석에서 색깔을 추출해 내는 방법도 어렵지만 추출해 낸 색깔을 칠하는 방법도 만만치 않다. 어떤 색깔은 원석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색깔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래알처럼 입자가 굵어야만 그 색깔을 낼 수 있다. 모래알처럼 굵은 입자를 안정적이고 내구성 있게 칠하는 데는 고도의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다. 모래알처럼 굵은 입자의 경우, 자칫하면 박락(剝落)[그림이나 글씨가 오래 묵어 긁히고 깎이어서 떨어짐] 현상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와 같은 박락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모래알처럼 굵은 입자를 아교[동물의 가죽이나 뼈를 고아 굳힌 황갈색의 접착제]에 타서 쓰면 색이 칠해지겠습니까. 입자가 커서 굴러다니겠죠. 이것을 안정적으로 내구성 있게 칠하려면, 처음에는 아교를 조금 강하게 쓰고 그 다음에는 점점 더 약하게 써야 하는데, 그걸 데이터를 내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기계 같으면 데이터에 넣으면 되겠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경험으로 하는 거죠.”

전통 방식 그대로 이어 나갈 것

과학이 아무리 발달했다 해도 아직까지는 과학이 근접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석채가 바로 그러한 경우다. 설령 어렵게 새로운 원석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그 효과에 대해 지금 당장 판단 내릴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다. 지금 그가 사용하고 있는 석채는 대부분이 그가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전해 들었던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수집한 것이다. 다만 석채는 그 시절에도 귀한 것이라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중요한 작품에 조금씩 사용했을 뿐이다. 새로운 석채 발굴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새로운 석채 발굴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개인이 혼자서 모두 충당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사실 개인이 불교 회화에서 전통적으로 써 왔던 석채와 같은 재료를 발굴해서 시험하고 또 보존하기는 굉장히 힘들어요. 때문에 국내에서는 다양한 석채를 구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선친한테 들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몇 가지는 제가 직접 채집해서 쓰고 있지만, 그마저도 명맥이 끊겨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는 불화계에서 전통 기법이 사라질까 늘 안타깝다. 석채에 대해 학자와 전문가들이 제대로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그는 천연 석채를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직접 발품을 팔아 가며 채집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단청의 가장 기본색인 뇌록색[진한 녹색]의 경우 뇌성산이라는 곳에서 구할 수 있다.

“포항 가는 길에 뇌성산이라고 있어요. 포항과 경주의 경계 지역인데, 처음에는 등불을 들고 숲을 헤치고 갔는데 아무것도 없어요. 근데 자세히 살펴보니까 바위틈에 뭔가 있어요. 그걸 정 같은 걸 가지고 가서 직접 채광해 와서 쓰기도 했죠.”

황토의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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