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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옹왕사 관련 사찰 불적답사 경상도편 "유석사(留石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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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21.01.0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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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옹왕사 관련 사찰 불적답사 경상도편 "유석사(留石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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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사(留石寺)

1368년 나옹왕사 중창 사찰

주소 경북 영주시 풍기읍 창락리 산36

 

유석사는 유석암(留石庵)이라고도 불린다.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창락리 소백산에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이다. 694년 신라 효소왕 3년 해동진언종의 초조인 혜통이 창건했다. 1368년 고려 공민왕 17년 나옹혜근(懶翁慧勤)이 중창했으며, 1387년 우왕 13년 구곡(龜谷)이 중수했다.

 

그 뒤 조선시대 후기까지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1876년 고종 13년 불이 나서 낙암과 계홍이 중건했으며, 1928년에는 주지 이제봉이 중건했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요사채가 있다. 유물로는 고려시대의 철불이 있었으나, 1970년대에 도난당했다고 한다.

 

유석사 전설 유석사(留石寺) 이름에 얽힌 이야기는 두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신라 의상조사가 이 절 앞에 있던 느티나무 아래 반석에서 묵고 간 일이 있다고 하여 유석사(留石寺)라고 불리는 것과, 인근에 자리한 희방사를 희사한 경주의 호장 유석이 두운조사와 인연을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절이라는 뜻으로 유석사라고 붙여 졌다고도 한다.

 

현재는 전자의 뜻으로 절 이름이 불리고 있다.

 

유석사는 신라시대에 지어진 천년 고찰로 소백산 남쪽 자락 영주와 풍기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에 터를 잡고 있다. 천년의 세월 동안 오직 불도를 닦는 스님들의 공덕이 산 아래 중생들에게 스며들지 않았을까 짐작할 만하다.

 

경주에 사는 유석이 400리 나 되는 경북 북부지역까지 올라와 첩첩산중 소백산 자락에 절을 지었다.

 

신라의 호장 유석이 스님과의 인연을 내세까지 이어가기 위해 불심을 쌓기 위함이 중생이 부처님과의 인연으로 극락세계에 들고자 한 그 마음과 같을 것이다. 불도를 닦는 스님들이 중생들을 내려다보며 그 고통을 들기 위해 밤낮으로 불공을 드리는 것과 중생 이 부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절을 우러러 봄이 이곳 소백산 유석사에 고스란히 묻어 있다.

 

유석사는 또 희방사 설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영주군지, 희방지사, 국사대사전 등에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신라 선덕여왕 12(643) 두운조사는 태백산 심원암이란 암자에서 수도를 하다가, 지금의 풍기읍 희방사가 있는 소백산으로 자리를 옮겨 초막을 짓고 수도를 계속하였다고 한다.

 

어느 눈보라 치는 겨울날, 오직 수도에 여념이 없는 조사 앞에 암범 한 마리가 찾아와 괴로워하는 눈치를 보였다.

 

조사가 자세히 살펴보니, 산기가 임박해 있으므로 부엌에 검불을 깔아 새끼를 낳게 해주었더니 범은 새끼 두 마리를 낳았다. 그 후 조사가 어린애처럼 알뜰히 거두어 준 것이 인연이 되어 범이 은혜를 갚고자 몇 번이고 찾아오게 된다.

 

어느 날 범이 찾아와서는 조사의 장삼을 물고 당기므로 따라가 보았더니 앞산 큰 바위 밑에 혼수상태에 빠진 한 처녀가 누워 있었다. 조사는 급히 처녀를 움막으로 옮긴 뒤 물을 끓여 먹이고 정신을 차리게 한 후 이렇게 된 연유를 물으니 저는 경주 계림에 사는 호장 유석의 무남독녀로서 오늘 결혼식을 치른 후 저녁에 막 신방에 들어가려는 찰나, 불덩이 같은 것이 몸에 부딪히더니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을 느낀 후 어떻게 된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너희 집에서 얼마나 걱정하겠느냐? 며칠 쉬었다가 곧 돌아가도록 하여라.” 그 뒤 조사는 그 여자에게 남복을 입혀 총각처럼 꾸며 경주로 데리고 갔다. 딸의 이야기를 들은 유호장은 조사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죄송하오나 조사님은 딸의 죽은 목숨을 살려 주신 은인이니 불민한 것이오나 거두어 인연을 맺게 해주실 수 없겠습니까?"하고 은근히 사위 되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조사는 나는 이미 속세와 인연을 끊고 산중에 들어가 수도하는 몸이요, 이미 따님과는 남매의 인연을 맺었으니 그런 당치도 않는 말씀은 하지 말아 주시오.”하고 완강히 거절했다.

 

유호장은 조사의 수도생활에 대하여 이야기를 듣고 조사에게 큰 절을 지어 주기로 결심하였다. 유호장은 조사가 경주에서 한 3개월 순례하며 쉬었다갈 것을 청하고, 풍기읍에서 소백산 연화봉으로 가는 길은 새로 닦아 큰길을 만들었고, 동구 앞 여울 에는 쇠다리까지 놓아졌다.

 

그뿐만 아니라 조사가 살던 초막은 없어지고 단청도 새로운 큰 법당을 비롯하여 많은 건물이 즐비하였다. 그제야 유호장은 사람을 보내어 3개월 동안 절을 지어 놓았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전 가족에게 기쁨을 주었기에 희방사(喜方寺)라 절 이름을 지었고, 저 아래 다리는 수철교(水鐵橋), 풍기 서문 밖에 놓은 다리는 유()다리라고 이름하였다.”고 했다.

 

또 유호장은 조사와 인연을 길이 기념하고 조사가 머물고 있는 곳 가까이에서 법문을 들으며 수도하기 위하여 도솔봉 아래 조그마한 암자를 지어 살았는데, 그곳이 바로 유석사가 되었다고 한다.

 

풍기 I.C를 빠져나와 희방사 방향으로 7km쯤 가다보면 창락리가 나오는데 창락리 입구에 들어서면 유석사라는 표지가 보인다. 사찰 이정표에 3km라고 적혀 있는데 막상 가보니 5km 남짓 되는 것 같다.

사찰이 위치해 있는 곳이 해발 800m 정도 위치에 있어 차량으로 초행길에 올라가는데 도로도 좁은 편이며 경사도가 심하여 혼자 올라가면서 큰 애를 먹었다. 15분 정도 올라가니 유석사 법당이 보인다.

 

대웅전 부처님께 참배하고 약숫물을 한 컵 마시고 나서 아래 영주시를 내려다보니 얼마나 높이 올라왔는지 알 것 같다. 유석사는 범종각 옆 소나무가 일품이고, 요사채 앞쪽 느티나무가 좀 오래되어 그 역사를 말해 주는 듯하다. 이 높은 산에 올라 왔건만, 대중 누구 한 사람 나와 보지 않는다.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이 높은 산을 올라오진 않았지만, 원래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는 불가의 말처럼 좋은 뜻으로 해석하여 정진하는데 세속의 정을 끊어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실상의 도리를 자각하라는 선인들의 뜻이 담겨 있으리라 생각한다.

 

다시 한번 영주 시내를 보면서 나옹왕사께서 이 높은 곳에서 정진하였다고 생각하니 그러한 서운한 마음은 달아났다. 오히려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의 화두를 참구하면서 나옹왕사의 게송을 송()하고 조심조심 하산하였다.

 

현선자(玄禪者)가 게송을 청하다.

참선에는 무엇보다도 신심이 으뜸이니

씩씩하게 공부하되 채찍을 더하라

어느 결에 의심덩어리가 가루가 되면

진흙소가 겁초(劫初)의 밭을 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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