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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설화] 도선국사 물외도인을 만나 질도참을 배우고 고령의 국기를 확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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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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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17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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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해드릴 불교설화대사전 전설편 “도선국사 물외도인을 만나 질도참을 배우고 고령의 국기를 확립하다 ” 이야기입니다. 


도선국사(道詵國師)는 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 2년에 전남 영암군(靈岩郡)·구림촌(鳩林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라 왕족의 후손 김씨요, 어머니는 강씨(姜氏)였다.

강씨 부인이 도선국사를 잉태할 때에 꿈에 어면 사람이 구슬 한 개를 주는 것을 받아 삼켰더니 그날부터 태기가 있어 낳으니 이분이 바로 도선국사였다.

도선국사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영리하여 모든 점이 범상한 어린이들 보다 뛰어났다.


15세 때에 구례군(求禮郡) 월유산(fT遊山) 화엄사(華縱寺)에서 예월화상(隸月褙尙)을 모시고 스님이 되었다.

이곳에서 5~6년간 대승경교(大乘經敎)를 연구하여 대의(代議)에 통하고, 20세 되던 해에 혜철국사(惠徹國師)에게 나아가 배우고, 동리산(桐裏山)의 서당 지장선사(西堂努葬禪師)를 찾아서 법을 묻고 도를 배웠다.


그리하여 마침내 무설의 설(無說之說)과 무법의 법(無法之法)을 줄 데가 없고 받을 곳이 없는데서 전해 받았다.

23세가 되어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그 뒤로는 운봉산 태백암 등지에서 부처님의 교외별전(敎外別傳:參禪)을 연찬하다가 회양현(懷陽縣) 백계산(白鷄山)의 옥룡사(玉龍寺)에 들어가서 낡은 건물을 중수하고 거기에서 일생을 마칠 뜻을 세웠다.


그것은 옥룡사의 산수가 절승하고, 수석이 맑은 까닭에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35세가 되던 해에 신라 제 49대 헌강왕(憲慷王)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도선 국사를 궁중으로 청하므로 국사는 어명을 거역할 수 없어서 사자를 따라 궁중으로 들어갔다.


국사는 궁중에 머물러 계시는 동안 왕에게 나라 다스리는 법과 백성 사랑하는 도와 진리를 찾는 방법과 덕을 심는 선연(善緣)을 주달(奏達)하여,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옳은 길로 나아가도록 충간하다가 얼마 후에 다시 산으로 돌아가기를 주청하여 마침내 윤허를 받아 궁중을 떠나게 되었다.

궁중에서 물러나온 국사는 바로 옥룡사로가지 않고 지리산 구령(毆嶺)이라는 곳에 작은 암자를 짓고 그곳에서 폐침망식(廢寢忘食)하면서 일대사 인연(一大事因緣)을 위하여 돈독하게 정진하였다.


그렇게 하던 중 어느 날 이상하게 생긴 사람이 찾아와서 국사에게 재배하고 말하기를,


「제자는 물외(物外)에 방랑(旅浪)하기를 여러해이온데 조그마한 술법(術法)을 알고 있습니다.

존사께서 꾸지람 않으시고 버리시지 않으시면, 후일 남해(南海)가에서 가르쳐 드리고자 합니다.

이 술법도 모두 대보살이 중생을 교화하고 세상을 구제하는데 큰 방편이 되오니 가벼이 물리치지 마시고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줄 아옵니다.」


하고 말이 끝나자 그 사람은 온데 간데 없이 보이지 않았다.

국사께서는 이상하게 여기고 그 뒤에 약속한 장소에 갔더니 과연 그 곳에서 다시 그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 사람은 바닷가 모래 위에 산천지리의 형세를 그리고, 모래를 모아서 산세의 순역(山勢之順逆)을 모형(模形)하여, 풍수지리의 비결을 소상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돌아보니 그 사람은 또 간 곳이 없었다.

이 후 국사는 날마다 모래 위에 그려서 모형하여 놓은 산천지리의 형세를 가서 보고 연구한 결과 활연하게 깨달은 바 있어 산천지리의 혈맥과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술법을 거울 보는 것과 같이 환하게 알게 되었고, 국사는 그것을 본떠서 한권의 책을 만들었으니 그 책이 바로 유명한 옥룡자예결(玉龍子禮訣)이라는 책이다.


그러고 모래위에 산천 형세를 그렸던 곳을 마을 사람들이 사도촌(砂島村)이라고 불러와서 지금도 구례군 화엄사 밀에서「사도촌」이라는 마을이 있다.

국사께서는 이렇게 산천지리의 비법을 배운 뒤로 삼천리 강산을 두루 편답하면서 산세와 지리를 살피고 길한 땅 흉한 땅을 가려내고, 또 이 땅이 앞으로 누가 주인이 될 것인가를 명백하게 알았다.


즉, 송악산 만월대 밑에는 왕씨의 5백년 도읍지인 것을 알았고, 한양 북악산 밑에는 왕씨 다음에 이씨가 5백년 도읍할 터인 것을 알았으며, 나아가 무학대사가 한양터를 잡을 때 잘못 알아 왕십리에서 그릇 찾을 줄 알고, 그 자리 땅속 깊이 비석을 만들어 세우고, 그 비문에

「요승무학 왕심우차 왕십리(妖僧無學 枉尋于此 往十里)라 새겨서 묻은 것이라든지, 또 고려태조 왕건이 국사 열반한 20년 후에 왕위에 나아갈 것을 알고 왕건의 아버지 왕융(王隆)에게 유서를 보내어, 후일 왕융의 아들 왕건이 왕위에 즉위하거든 즉시 10대 사찰을 지을 것과, 또 국내에 모두 3천 8백 비보사찰(婢補寺訓)만 짓고 그 밖에 함부로 절을 짓지 말 것과, 한양의 외청룡 등에 청룡사를 짓고 비구니를 주석케하여 왕조의 사직을 오래 유지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그 후 도선 국사가 열반하신 20년 만에 과연 왕건은 고려의 태조가 되고 삼국을 통일하였다.

또한 왕건은 국사의 유언대로 즉위 2년에는 개경을 중심으로 10대 사찰을 지었고, 즉위 5년에는 한양에 청룡사를 창건하여 혜원비구니를 칙주하게 하였다.


도선국사는 수 10년간 전국 산천을 편답하고, 산세지리에 길지 명당을 찾으면서 소요자재하다가, 만년에 옥룡사에 돌아와서 고요히 정업을 닦던 중 어느 날 국사께서는 제자들을 모두 불러오게 하여 앉히고


「나는 오늘 가노라! 인연 쫓아 왔다가 인연 따라가노라. 그대로 진리인 걸 무엇을 슬퍼하랴!」


하고 말씀이 끝나자 가부좌하고 그대로 열반하니 때는 신라 제 52대 효공왕(孝恭王) 2년 3월 10일이었다.

이 때 국사의 세수는 72세요, 법랍은 58세였으며, 심인(心印)을 받은 제자는 공적(空寂)등 수천명에 이르렀다.


신라 효공왕은 국사의 열반을 애석하게여기고, 친히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또 탑명(塔銘)을 징성혜등(澄聖慧燈) 이라고 내리었다.

또 후일 고려의 제8대 왕인 현종(顯宗)은 (1009~1031) 왕건태조의 화가위국(化家爲國)하여 창업(創業)한 것이 도선국사의 유훈의 덕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을 다시 새롭게 인식하고 국사에게 대선사(大禪師)의 시호를 내리고, 제 15대 왕인 숙종(肅宗)은(1095~1105) 선각국사(先覺國事)의 시호를 내리었고, 제 18대 왕인 의종(殺宗)은 (l146~l176) 비석을 세워서 국사의 행적을 기록하도록 명령하였다.


고려왕조가 34왕 475년 동안 나라를 통치 하고(918~ 1392) 이어 이성계(李成桂)가 이씨왕조를 건국하니 때는 국사 열반 후 495년 만이었다.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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