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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화보] 불교 탄압 조선시대에 숙종은 왜 각황전을 중건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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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등록일
2021.08.03 09:11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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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황전 앞의 모습
  
▲ 각황전 앞 봄풍경
  
▲ 각황전 앞 홍매화
  
▲ 각황전 앞 벗꽃
  
▲ 각황전 앞 석등
  
▲ 각황전 앞 석등
  
▲ 4사자 탑
  
▲ 각황전 현판
  
▲ 각황전 전경
  
▲ 각황전의 주부처님 석가모니불

[한국문화신문 = 최우성 기자] 화엄사 각황전은 한국내 사찰 전각 중에 가장 규모가 큰 전각이다. 현재 국보67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화엄사는 본래 544년 중국을 거처 한국으로 온 인도스님인 "연기조사"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그런 연유로 화엄사에는 연기조사를 기리는 4사자 석탑이 각황전의 언덕 위에 모셔져 있고, 연기조사가 어머니를 향하여 공양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연기조사 이후에는 신라 진흥왕 때 중국의 화엄종을 전수한 의상대사가 신라땅에 화엄10찰을 정하여 화엄종을 융성케 하였는데 이때 화엄사는 그 중심사찰이 되었다. 화엄사에는 이후 크게 발전하여 현재의 각황전 자리에는 장육전을 짓고 화엄경을 돌판에 새긴 화엄석경을 모셨다고 한다. 화엄사는 말 그대로 화엄경의 불국토 세계를 구현하고자 하였던 사찰로 이후 도선국사가 크게 중창하였다.

이렇게 융성하던 화엄사는 고려를 거치고 조선조에 이르기까자 사세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민족의 최대 수난인 임진왜란 때 수 백칸의 전각이 모두 소실되어 폐허가 되어있었다. 이후 1630년 인조대에 부분적으로 건물을 짓고 새롭게 사찰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으나, 150여년을 거의 폐허가 된 상태로 내려오다가, 조선 후기 숙종28년(1702)에 이르러 숙종의 특별 보시에 의하여 각황전이 중건되게 되었다. 본래 각황전 자리에는 장육전이란 현판을 단 전각이 있었다고 하나, 이를 대신하여 새로 지은 전각은 각황전이라는 숙종의 사액을 받고 들어선 것이다.

불교가 탄압받던 조선시대 숙종은 무슨 연유로 궁궐의 정전보다도 더 큰 불사건물을 짓도록 보시했을까?  무척 의아스럽게 생각되지만 숙종이 불사 건물 그것도 궁궐의 정전 건물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각황전을 짓도록 보시한 연유는 그 동안의 스님들과 불교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었다.

모두가 알다 시피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살생을 가장 금하는 불교의 스님들은 수행처인 사찰을 승병들의 본거로 삼고 왜병들과 싸웠고, 혁혁한 전과도 거두었다. 또 그런 과정에서 1000여년을 유지해오던 사찰의 전각들은 왜적이 지나간 모든 곳이 남김없이 불에 타고 말았다. 그러나 그에대한 국가적 보상은 전혀 없었다. 국가를 대신하여 승군을 조직하여 왜적과 싸우고 백성의 정신적 귀의처가 되어주고 또 국가에서 부여한 각종 세금과 특산품을 만들어 바치고 ...

그런데 그것 만으로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에서 스님들이 기거하고 수행하는 사찰의 전각을 기꺼이 지어준 것은 아니고, 처절한 임진왜란이 끝이나고서도 특별히 왕실과 궁에의 복원에스님들의 공이 컸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끝이나고 다시 평화가 찾아왔으나, 조선은 그야말로 폐허 그 자체였다. 그리되자 백성은 물론 왕 또한 기거할 궁궐다운 건물도 없이 한동안 민가에 거처를 정하고 살면서 그곳에서 정사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이 오랫동안 계속되다가 어렵사리 건축자금을 모아서 궁궐을 복원금고자 하였다. 그런데 조선에는 궁궐복원자금과 목재를 구할 수는 있었지만, 궁궐을 지을 만한 기술자들이 없었다. 작은 기와집이나 짓던 민간 목수들로는 우람하고 복잡한 공포로 이루어진 건물을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왕실과 조정에서는 사찰에서 스스로 대웅전 등 복잡한 건물을 지어본 대목수 스님들을 초청하여 창덕궁 창경궁 등 궁궐들을 하나 하나 복원해갔고, 그 과정에서 전국의 스님네들이 아무런 보상도 받지 않고 차출되어 궁궐들을 복원했던 공로를 숙종이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전국의 내노라 하는 사찰의 대웅전등은 화엄사 각황전 처럼 우람하고 당당한 전각들이 많이 있었다.  이런 건물들이 임진왜란으로 다 불이 탄뒤에 이후로는 본래의 건물규모로 중건하지 못하고, 모두 축소되었다. 그런 연유로 임진왜란 이후의 한국사찰 건축물은 이전 건축물의 1/2이나 1/3로 축소되었고, 또 대웅전은 대부분 중층의 당당한 건축물이었으나, 자금이 부족하다보니 대부분 단층으로 짓고, 단청만을 화려하게 꾸미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한국사찰건축의 본래 모습인양 착각하고 살고 있다. 

지금은 빈터로만 남아 있는 경주 황룡사지나 익산의 미륵사지에서 그 웅대한 옛 사찰건축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1400년 전(서기 600년 전후)에도 그리 우람한 건축을 했었던 한민족이 지금은 그보다 훨씬 못한 건물들을 가지고 현재의 모습이 한국의 전통건축으로 대표되고 있고, 그것들이 대단한듯 하는 것은 못난 후손의 넋두리 처럼느껴진다. 

건물이 꼭 커야만 위대한 것은 아닐 것이다. 또 근래에는 불사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뭐하러 절들을 그리 많이 또 크게 짓느냐고 불평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고 기술이 발전하면 그에 비례하여 건물도 커지고 당당하게 발전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금의 한국 사찰건축을 대표하는 건물로 서울 종로에 있는 조계사 대웅전이다.
 
하지만 조계사 대웅전은 서울 한 복판에 있을 뿐, 그 품격으로서는 아무리 꾸미고 주변을 가꾸고 덧칠을 해도 600년대 지어진 황룡사 미륵사의 품격을 갖출 수 없다. 뿐만이 아니다. 조계사 대웅전은 본시 사찰의 대웅전으로 지어진 것도 아니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보천교의 본당(十一殿)으로 지었던 것을, 이전하여 세운 건물이다.  이제라도 한국의  불교 사찰의 본찰로 제대로된 전각과 격식을 갖춘 가람건축이 계획되고 실현되기를 기원해보는 것은 기자만의 소망이 아니었으면 싶다.

그나마 한국의 사찰 건축물로 우람한 각황전 앞에서 한국의 옛 건축의 영화가 되살아나길 기원해 보며... 안타까움과 함께  아쉬움을 달래본다. 제대로 된 이시대의 한국사찰건축의 본찰을 이룩하고 싶다. 어쩌면 그런 대 사업이야말로 한두개의 작은 전각들을 세우는 것보다 훨씬 시급하고 뜻 깊은 일이 아닐까 하고 기자는 늘 생각한다. 그런 큰 뜻을 가진 큰스님이 언제쯤 나타날는지.... 학수고대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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