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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 서산의 천년고찰 보원사터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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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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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넓은 보원사터 전경, 발굴된 석물들과 오층석탑이 보인다.오랫만에 내린 눈이 소복하게 쌓여 모아놓은 돌기단을 안아주고 있는 듯 보인다. 

▲ 드넓은 보원사터 전경, 발굴된 석물들과 오층석탑이 보인다.오랫만에 내린 눈이 소복하게 쌓여 모아놓은 돌기단을 안아주고 있는 듯 보인다.

 

발굴된 석조물들로 가득한 보원사터와 오층석탑
▲ 발굴된 석조물들로 가득한 보원사터와 오층석탑

 

발굴된 석조물들. 오층석탑 뒷쪽으로 멀리 승탑도 보인다
▲ 발굴된 석조물들. 오층석탑 뒷쪽으로 멀리 승탑도 보인다

 

발굴된 석조물들과 현재 보원사
▲ 발굴된 석조물들과 현재 보원사

 

보원사 오층석탑과 법인국사 탄문의 승탑과 탑비, 고려시대 고승들의 승탑은 절의 가장 깊숙한 곳의 언덕 위에 배치한 경우가 많다.
▲ 보원사 오층석탑과 법인국사 탄문의 승탑과 탑비, 고려시대 고승들의 승탑은 절의 가장 깊숙한 곳의 언덕 위에 배치한 경우가 많다.

 

보원사 오층석탑, 땅속에 묻혀서 오히려 훼손이나 손상은 피한 듯하다. 오층석탑은 고려시대에 나타난 석탑의 형식으로, 신라시대 정형화된 불국사 삼층석탑의 형식에서 발전한 형식으로, 고려시대에 많이 조성하였다.탑의 상륜부는 없어졌지만, 상륜부를 지탱하던 쇠기둥인 찰주가 원형으로 남아있어 상륜부는 불국사 석가탑과 거의 같은 양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 보원사 오층석탑, 땅속에 묻혀서 오히려 훼손이나 손상은 피한 듯하다. 오층석탑은 고려시대에 나타난 석탑의 형식으로, 신라시대 정형화된 불국사 삼층석탑의 형식에서 발전한 형식으로, 고려시대에 많이 조성하였다.탑의 상륜부는 없어졌지만, 상륜부를 지탱하던 쇠기둥인 찰주가 원형으로 남아있어 상륜부는 불국사 석가탑과 거의 같은 양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탑의 기단 4면에는 각면에 2구씩 천상세계를 지키는 신장이 새겨져 있는데 그 팔부신중 중 햇볕이 잘 드는 면의 한분
▲ 탑의 기단 4면에는 각면에 2구씩 천상세계를 지키는 신장이 새겨져 있는데 그 팔부신중 중 햇볕이 잘 드는 면의 한분

 

보원사 안쪽 법인국사 탑에서 본 오층석탑과 금당터, 그리고 멀리 가설건축물로 새롭게 들어선 보원사, 옛날의 영화를 되찾고자 기원하고 있다.
▲ 보원사 안쪽 법인국사 탑에서 본 오층석탑과 금당터, 그리고 멀리 가설건축물로 새롭게 들어선 보원사, 옛날의 영화를 되찾고자 기원하고 있다.

 

보원사터 전경, 왼쪽에 감나무가 자라고 있는 땅까지 흙으로 덮혀 있었던 것을 발굴조사로 걷어내고 나서야 본래 절터의 높이가 나왔다.흙으로 덮인 깊이는 1m가 넘는다.
▲ 보원사터 전경, 왼쪽에 감나무가 자라고 있는 땅까지 흙으로 덮혀 있었던 것을 발굴조사로 걷어내고 나서야 본래 절터의 높이가 나왔다.흙으로 덮인 깊이는 1m가 넘는다.

 

당간지주와 오층석탑
▲ 당간지주와 오층석탑

 

보원사터 사찰의 입구에서 본 당간지주와 오층석탑, 보원사의 배치는 "당간,-중문 -탑-금당" 이 일렬로 길게 늘어선 백제가람배치양식 1탑 1금당의 형식이었다.
▲ 보원사터 사찰의 입구에서 본 당간지주와 오층석탑, 보원사의 배치는 "당간,-중문 -탑-금당" 이 일렬로 길게 늘어선 백제가람배치양식 1탑 1금당의 형식이었다.

 

보원사터 거대 석조(돌로된 물그릇 통). 크기가 평면은4m x 2m에 높이는 60cm에 이른다.
▲ 보원사터 거대 석조(돌로된 물그릇 통). 크기가 평면은4m x 2m에 높이는 60cm에 이른다.

 

보원사 맨 안쪽에서 본 오층석탑과 당간지주, 오층석탑의 아래에는 금당터가 있다.
▲ 보원사 맨 안쪽에서 본 오층석탑과 당간지주, 오층석탑의 아래에는 금당터가 있다.

 

보원사터 맨 안쪽에 세워진 법인국사 탄문의 승탑과 탑비
▲ 보원사터 맨 안쪽에 세워진 법인국사 탄문의 승탑과 탑비

 

법인국사 탄문의 승탑과 탑비
▲ 법인국사 탄문의 승탑과 탑비

 

법인국사 탄문의 행적을 새긴 탑비
▲ 법인국사 탄문의 행적을 새긴 탑비

 

법인국사 탄문의 승탑
▲ 법인국사 탄문의 승탑

 

법인국사 탄문의 승탑 좌대 입체조각상, 평면이 팔각형으로 8면에 가득하다.
▲ 법인국사 탄문의 승탑 좌대 입체조각상, 평면이 팔각형으로 8면에 가득하다.

 

상왕산 등산길, 이 길을 따라서 2km 쯤 가면 상왕산 개심사가 있다.
▲ 상왕산 등산길, 이 길을 따라서 2km 쯤 가면 상왕산 개심사가 있다.

 

보원사터에서 발굴된 수많은 기와조각들
▲ 보원사터에서 발굴된 수많은 기와조각들

 

보원사터에서 약 1.2km 떨어진 곳에 있는 서산 용현리마애불
▲ 보원사터에서 약 1.2km 떨어진 곳에 있는 서산 용현리마애불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보원사는 충남 서산군 운산면 용현리에 있었던 큰 절이었다. 보원사의 창건은 백제 후기로 생각되는데, 보원사터 근처에는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 《용현리마애삼존불》이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용현리마애삼존불》은 백제 후기에 세운 보원사의 주변 기도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보원사에 대한 기록은 장흥 보림사의 보조선사 체징의 탑비에 나오는데, 보조선사 체징은 827년(흥덕왕2)에 보원사에서 구족계(비구와 비구니가 받는 계율)를 받았다고 한다.  또 신라 후기 효공왕8(904) 보원사는 신라 화엄 10찰의 하나로 융성하였다고 최치원이 법장화상전에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런 보원사는 고려초 광종26년(975)에 당대 고승인 법인국사 탄문이 입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정종 2년(1036)에는 보원사의 계단(戒壇)에서 승과고시로 경전시험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는 계단(수계를 받는 제단)이 어디였는지 알 수 없으나 보원사에도 통도사 금강계단이나 금산사 방등계단 처럼 계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조에 이르러 중종 25년(1530)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상왕산에 보원사가 있다고 한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까지 사세가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 때 만들어진 경판이 현재 상왕산 건너편에 있는 개심사에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절의 이름도 바뀌어 강당사가 된 것으로 보아, 전란을 겪으면서 크게 손상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더욱 기울어가던 절은 결국 폐사되고 말았다.

 

현재 보원사터에는 보물로 보원사터 석조(물을 담는 큰 돌그릇), 보원사터 당간지주, 보원사 오층석탑, 보원사터 법인국사탑과 법인국사탑비 등 5점의 보물이 있으며, 그외 이곳에서 발굴되었으나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는 보원사 철조여래좌상이 있다.

 

백제의 미소로 해맑은 미소를 간직한 《용현리마애삼존불》은 보원사터에서 약 1km 정도 떨어진 바위산의 암벽위에 있다. 한국의 고찰들은 수많은 수도승들이 거쳐갔던 한국문화의 산증거들이지만 안타깝게도 수천년의 역사기록이 조금밖에 남아있지 않아 안타깝기 그지 없다. 그나마 땅속에 묻혀있던 돌로된 탑과 당간지주 그리고 승탑 등이 있어 짐작이라도 할 수 있음을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폐사가 되고만 보원사터의 한쪽에는 끊어진 절의 명맥을 다시 살리겠다며 가설건축물을 세우고 기원하는 보원사가 있어 희망의 불씨를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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