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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명사 계묘년 성지순례 및 방생법회 봉행
방생 오정국 -시인-
당신은 나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캄캄하게 눈이 먼 나를 벌판에 내던져 놓고
천지간의 눈보라로 퍼붓는 당신,
내 몸이 하얗게 얼어 붙을 때
당신이 밝고 다닌 길도
지렁이처럼 토막나는 걸 보았습니다.
나는 제 탯줄을 먹는 짐승처럼 밤새 그걸 삼켰습니다.
당신은 나를 버리고 나서도
끝끝내 나를 버려두지 않습니다.
오정국 시인의 방생에 관한 시이다. 진정한 방생은 미물을 원래 사는 곳으로 돌려보낸다는 의미도 있지만 궁극에서는 자신이 우주와 하나임을 자각하는 것이며 우주 동근(同根)이며, 동체대비(同體大悲)임을 알아차림이며 깨여 있는 여여(如如)함이다.
지난 2월 11일 영명사 신도 분들을 모시고 경주 문무대왕릉 앞 동해 청정도량에서 방생법회를 봉행하고 부산 태종사 성지순례를 봉행하였다. 근번 방생법회를 봉행하는 문무대왕(661∼681)은 본명 김법민(金法敏) 별칭 법민왕, 문호왕 성은 김(金), 이름[諱]은 법민(法敏), 시호는 문무(文武)이다. 이름을 따서 법민왕(法敏王)이라고도 하며, 《삼국유사》에는 ‘문호왕(文虎王)’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 654~661)의 적장자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김유신(金庾信)의 누이인 문명왕후(文明王后) 김씨이다. 파진찬(波珍飡) 선품(善品)의 딸인 자의왕후(慈儀王后)를 비로 맞이해 제31대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을 낳았고, 다른 자녀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삼국유사》 ‘왕력(王曆)’ 편에는 왕비는 선품(善品) 해간(海干)의 딸 자의(慈義)로 자눌왕후(慈訥王后)라고도 하며, 어머니는 훈제부인(訓帝夫人)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은 외모가 영특하고 총명하며 지략이 많았다. 650년(진덕여왕 4)에는 사신으로 당나라로 건너가 당나라 고종(高宗, 재위 649~683)에게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 647∼654)이 지은 《태평송(太平頌)》을 전했고, 대부경(大府卿)의 지위를 받고 귀국했다. 654년(무열왕 원년) 무열왕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파진찬(波珍湌)의 지위에 올라 병부령(兵部令)으로 임명되었고, 655년(무열왕 2)에 태자로 봉해졌다. 660년(무열왕 7)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를 공격할 때에는 병선 1백 척을 이끌고 덕물도(德物島, 지금의 덕적도)로 가서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를 맞이했고, 두 나라 군대가 각각 해로와 육로로 진격해 사비성(泗沘城)에서 만나기로 협의했다. 그리고 웅진성(熊津城)에서 백제 의자왕(義慈王, 재위 641~660)의 항복을 받아내는 데도 공을 세웠다.
문무왕은 681년(문무왕 21) 음력 7월에 죽었으며, 유언에 따라 화장해 동해의 큰 바위에 장사지냈다.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탁본이 전해지는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에는 당시 나이가 56세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무왕이 죽은 뒤에는 태자인 정명(政明)이 제31대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으로 즉위했다. 《삼국사기》에는 문무왕이 죽기 전에 불교식으로 화장하고, 장례를 검소하게 하며, 불필요한 조세를 모두 폐지하고, 법령과 격식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바꾸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나온다. 전설로는 문무왕이 용이 되었으며, 왕의 유해가 안치된 바위를 대왕석(大王石)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문무왕이 왜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감은사(感恩寺)을 지었으나 완성시키지 못하고 죽자 바다의 용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오늘날 경주 문무대왕면 봉길리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의 문무대왕릉은 사적 제158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삼국유사》의 ‘문호왕 법민(文虎王法敏)’ 조에는 문무왕이 즉위하던 해에 사비(泗沘)의 남쪽 바다에서 키가 73척(尺)에 발길이가 6척이나 되는 거대한 여인의 시신이 발견되었으며, 용궁(龍宮)에서 비법을 전해 받은 명랑법사(明朗法師)가 675년(문무왕 15)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짓고 문두루(文豆婁)의 비법으로 풍랑을 일으켜 신라를 쳐들어온 당나라 배들을 침몰시켰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문무왕이 661년(문무왕 원년)에 자신의 외가 15대조인 수로왕(首露王)의 제사를 지내도록 왕위전(王位田)을 지급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위와 같은 동해안 청정도량에서 방생법회를 봉행하고 도성큰스님께서 주석하고 계시는 부산 태종사에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태종사는 부산광역시 영도구 전망로 119에 위치한 사찰로서 1983년 스리랑카 정부로부터 기증받은 부처님 상 1점과 정골사리2개를 봉안한 사찰이며 해탈보리수가 있고 현재 세납 104세 도성큰스님께서 정진하고 계시는 사찰이다. 도성큰스님께서는 열반하신 성철큰스님께서 성전암에서 두문불출 때에서 해제 때면 항상 찾아 뵙고 하였으며 성전암에서 3000배와 15시간 서있는 가행정진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큰스님께서는 1919년 평안남도 양덕군 쌍용면 관봉리에서 출생하였으며 1953년 부산 선암사에서 지월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고 1955년 해인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하였으며 1978년 해인사주지, 1980년 미얀마에서 수행, 1989년 대흥사 주지, 교구본사주지연합회회장, 1990년 태국 마하출라랑콘대학 한국분교학장, 2003년 스리랑카 국립 승가위원회로부터 ‘삼붇다 사사나 조띠카’칭호를 받았으며 현재는 태종사에서 정진하고 계신다.
태종사는 도성큰스님께서 도량을 화장세계(華藏世界)로 가꾸어 놓고 계신다. 그 화장세계(華藏世界)는 불두화가 중심에 있다. 불두화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곱슬한 머리카락인 나발을 닮아 붙여졌다고 한다. 불두화가 피는 시기는 사월초파일 즈음으로 ‘부처의꽃’으로 불리기도 하며 2006년부터 불두화와 함께 수국축제를 열고 있다. 불두화와 수국은 많이 닮았다. 수국은 미세한 꽃들이 무리를 이루어 꽃 모둠과 형성해 그 탐스러움이 불두화와 비슷하다. 개화 시기도 수국이 불두화보다 한 달가량 늦다. 큰스님께서 도량불사 가람불사도 수행의 방편이라고 여겨 오늘의 태종사 도량을 일구워 놓았다.
지난 몇 년에 걸쳐 코로나19로 지친 영혼을 이번에 다녀온 방생법회와 성지순례를 통하여 정신을 맑히고 각자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정을 발원하고 세간의 행복과 구경에서는 출세간의 무루의 복락을 발원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아래 글은 법정스님의 유작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의 [도반]이다. 모두가 이 글을 읽고 성불의 길에 들길 서원한다.
도반
진정한 도반은
내 영혼의 얼굴이다.
내 마음의 소망이 응답한 것.
도반을 위해 나직히 기도할 때
두 영혼은 하나가 된다.
맑고 투명하게
서로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도반 사이에는 말이 없어도
모든 생각과 소원과 기대가
소리없는 기쁨으로 교류된다.
이때 비로소 눈과 마음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하나가 된다.
영덕 축산 청정도량 영명사 주지 법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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