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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옹왕사 불적답사길 "구도자의 발자취를 따라서" [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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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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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열반불사

병진년(1376) 봄에 이르러 공사를 마치고 415일에 크게 낙성식을 베풀었다. 임금은 구관(具官) 유지린을 보내 행향사(行香使)로 삼았으며, 서울과 지방에서 사부대중이 구름과 바퀴살처럼 부지기수로 모여들었다.

 

마침 대평(臺評)은 생각하기를, 회암사는 서울과 아주 가까우므로 사부대중의 왕래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으니 혹 생업에 폐해를 주지나 않을까 하였다. 그리하여 임금의 명으로 스님을 영원사(瑩源寺)로 옮기라 하고 출발을 재촉하였다.

 

스님은 마침 병이 있어 가마를 타고 절 문을 나왔는데 남쪽에 있는 못가에 이르렀다가 스스로 가마꾼을 시켜 다시 열반문으로 나왔다. 대중은 모두 의심하여 목 놓아 울부짖었다.

 

스님은 대중을 돌아보고, “부디 힘쓰고 힘쓰시오, 나 때문에 중단하지 마시오. 내 걸음은 여흥(驪興)에서 그칠 것이요.” 하였다.

 

52일에 한강에 이르러 호송관 탁첨에게 말하였다.

 

나는 지금 병이 너무 심해 배를 타고 가고 싶소.”

 

곧 문도 10여 명과 함께 물을 거슬러 올라간 지 7일 만에 여흥에 이르러 다시 탁첨에게 말하였다.

 

"내 병이 너무 위독해 이곳을 지날 수 없소. 이 사정을 나라에 알리시오.”

 

탁첨이 달려가 나라에 알렸으므로 스님은 신륵사(神勒寺)에 머물게 되었다. 며칠을 머무셨을 때, 여흥군수(驪興郡守) 황희직(黃希直)과 도안감무(道安監務) 윤인수(尹仁守)가 탁첨의 명령을 받고 출발을 재촉했다.

 

시자가 이 사실을 알리자 스님은 말하였다.

"그것은 어렵지 않다. 나는 이제 아주 가련다.”

 

그때 한 스님이 물었다.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스님은 주먹을 세웠다. 그 스님이 또 물었다.

사대가 각기 흩어지면 어디로 갑니까?"

 

스님은 주먹을 맞대어 가슴에 대고 오직 이 속에 있다.” 하였다.

그 속에 있을 때는 어떻습니까?"

"별로 대단할 것이 없느니라.”

 

또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대단할 것 없다는 그 도리입니까?"

 

스님은 눈을 똑바로 뜨고 뚫어지게 보면서,

내가 그대를 볼 때 무슨 대단한 일이 있는가하였다.

 

또 한 스님이 병들지 않는 자의 화두(不病者話)를 들어 거론하자, 스님은 꾸짖는 투로 왜 그런 것을 묻는가하고는 이내 대중에게 말하였다.

 

"노승은 오늘 그대들을 위해 열반불사를 지어 마치리라.”

그리고는 진시(辰時)가 되어 고요히 돌아가시니 515일이었다.

 

여흥과 도안의 두 관리가 모시고 앉아 인보(印寶)를 봉하였는데 스님의 안색은 보통 때와 같았다. 여흥군수가 안렴사에게 알리고 안렴사는 조정에 고했다. |

 

스님이 돌아가실 때, 그 고을 사람들은 멀리 오색구름이 산꼭대기를 덮는 것을 보았고, 또 스님이 타시던 흰 말은 3일 전부터 풀을 먹지 않은 채 머리를 떨구고 슬피 울었다.

 

화장을 마쳤으나 머리뼈 다섯 조각과 이 40개는 모두 타지 않았으므로 향수로 씻었다. 이때에 그 지방에는 구름도 없이 비가 내렸다. 사리가 부지기수로 나왔고, 사부대중 이 남은 재와 흙을 헤치고 얻은 것도 이루 셀 수 없었다.

 

그때 그 고을 사람들은 모두 산 위에서 환희 빛나는 신비한 광채를 보았고, 그 절의 스님 달여(達如)꿈에 신룡(神龍)이 다비하는 자리에 서려 있다가 강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 모습은 말과 같았다.”고 했다.

 

문도들이 영골 사리를 모시고 배로 회암사로 돌아가려 할 때에는 오래 가물어 물이 얕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그런데 비는 오지 않고 갑자기 물이 불어 오랫동안 묶여 있던 배들이 한꺼번에 물을 따라 내려갔으니, 신룡의 도움임을 알 수 있었다.

 

29일에 회암사에 도착하여 침당(寢堂)에 모셨다가 815일에 그 절 북쪽 언덕에 부도를 세웠는데, 가끔 신령스런 광명이 환히 비쳤다. 정골 사리 한 조각을 옮겨 신륵사에 안치하고 석종(石鐘) 으로 덮었다.

 

스님의 수()57세요 법랍은 37세였으며, 시호는 선각(禪覺)이라 하였다. 그 탑에는 "ᄆᄆ 스님은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산승은 문자를 모른다' 하였다. 그러나 그 가송(歌頌)과 법어(法語)는 혹 경전의 뜻이 아니더라도 모두 아주 묘하다라고 씌어 있다.

 

이제 그것을 두 권으로 나누어 이 세상에 간행하게 되었으니, 스님의 덕행은 진실로 위대하다. 실로 이 빈약한 말로 전부 다 칭송할 수 없지만, 간략하게나마 그 시말(始末)을 적어 영원히 전하려는 것이다. 삼가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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