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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석사(禪石寺) 1361년 나옹왕사 이건(移建)
경북 성주군 월항면 세종대왕자태실로616-33
선석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이다. 692년(효소왕 1)에 의상(義湘)이 화엄십찰(華嚴十刹) 중 하나로 창건하여 신광사(神光寺)라 하였으나, 현재보다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1361년(공민왕 10)에는 나옹(懶翁)스님이 신광사 주지로 부임한 뒤, 절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그런데 당시 새 절터를 닦다가 큰 바위가 나왔다 하여 터 닦을 '선(禪)'자 를 넣어 절 이름을 선석사라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바위는 대웅전 앞뜰에 묻힌 채 머리 부분만 땅 위로 나와 있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1684년(숙종 10)에 혜묵(惠默) · 나헌(軒) 등이 중창하였다. 1725년(영조 1)에 서쪽의 옛터로 이건하였다가 1804년(순조 4)에 서윤(瑞允)이 신도들의 도움을 얻어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고 대웅전·명부전·칠성각·산왕각·어필각(御筆 閣)·정법(正法寮) 등의 당우를 갖추었다.
세종의 왕자 태실(胎室)이 있는 태봉(胎峰)에서 약 200m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던 이 절은 왕자의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로 지정되었으므로 영조로부터 어필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이 어필을 보관했던 곳이 어필각이었으나 그 뒤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 영조 어필의 병풍은 정법료에 보관되어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 칠성각 · 산신각 · 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대웅전은 정면 3칸의 맞배지붕 다포집이다. 이 절의 어필각 주위에는 바람이 불면 이상한 소리 를 내는 쌍곡죽(雙谷竹)이라는 대나무 숲이 있었다고 한다.
이 대나무를 잘라 만든 피리는 그 소리의 맑고 깨끗하기가 다른 피리와 비길 바가 아니었으며, 이를 교방적(敎坊笛)이라고 하였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 쌍곡죽이 남아 있지 않다. 성주지 방에서는 가장 큰 절이다.
※ 선석사는 이정표에 선석사와 함께 세종대왕자태실(世宗大子王胎室)을 같이 표시해 두었다. 선석사는 몇 년 전 인연 있는 스님과 함께 봉사단체 모임을 하고 있어 한 번 다녀간 적이 있는 곳이다. 그때는 나옹왕사와의 인연을 그냥 흘려 넘겼다. 세종대왕자태실의 외호 사찰로서 선석사가 있는 것으로만 알고 이번 답사 길은 영덕불교사암연합회 집행부 스님들과 함께 하였다. 고속도로 성주 IC로 내려서 시골 길을 한참 달려 선석사에 도착하였다.
나옹왕사가 신광사 주지로 부임한 뒤에 절을 현재의 자리로 이건하였는데 이때 절을 옮기려 터를 닦는데 큰 바위가 나와서 신광사에서 선석사로 사명을 개명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행 모두가 대웅전 부처님께 삼배의 예를 올리고 그 밖의 전각에 들러 예를 갖추고 나니, 부전스님께서 우리들을 안내해 주었다.
선석사 가까이 세종대왕 왕자 태실이 있는 관계로 사찰에서도 신도들을 위하여 대웅전 좌측
쪽에 태실법당의 전각이 새겨져 있다. 부전스님께서 사찰에서 태실법당이 있는 것은 전 세계에서 여기 밖에 없다는 말씀을 하신다. 태실법당에는 신도분 자녀의 태를 부처님 품 안에 모시고 기도하라는 안내 글귀가 보였다.
태실법당에서 기도하시는 스님의 목탁소리를 뒤로 하고 대웅전 뒤쪽에 모셔진 석조미륵불좌 상에 예를 갖추고 소나무 아래에서 대웅전을 보면서 나옹왕사의 게송 한 편을 송(誦)하고 하산하다.
각자선인(覺自禪人)에게 주는 글
도를 배우려거든 부디 강철 같은 뜻을 세우고
공부를 하려면 언제나 바싹 달라붙어야 하리
갑자기 탁 터지는 그 한 소리에
대지와 허공이 모두 찢어지리라
동행했던 스님들과 함께 나옹왕사께서 머물던 도량 곳곳을 살펴보고 세종대왕 왕자 태실이 있 는 곳으로 이동하여 태실을 살펴보고 다음 목적지 사찰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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