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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 고려 삼층석탑과 석조공양보살좌상, 강릉 신복사터
작성자
최고관리자
등록일
2022.02.18 09:53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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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복사터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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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운데에서 본 신복사터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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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복사터 삼층석탑과 공양보살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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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덮인 석탑 주변과 소나무로 둘러싸인 주변 석탑과 공양보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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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탑의 전체모습, 위 석탑은 고려시대의 양식으로, 신라시대 석탑과는 달라진 모습이다. 

석탑의 기본형식은 2층의 기단과 3층탑신으로 이루어진 것은 같으나, 

기단과 탑신에 모두 간석을 끼워넣어서 가장 다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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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탑을 향에 꿇어 앉아 공양물을 드리는 공양보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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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탑을 향해 꿇어 앉은 공양보살상인데, 머리 위에는 8각형의 보개를 이고 있다.
이러한 석조보살상은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앞에 있는 공양보살상과 거

의 같은 형상으로, 이는 법화경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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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면에서 본 석조 공양보살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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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층석탑과 공양보살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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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단으로 이루어진 석탑의 기단, 기단의 아래층 지대석에는 땅을 향하여 

연꽃문양이 감싸고 있으며, 그 위에 2층의 기단석이 있는데, 기단과 기단사이와 

기단과 탑신석 사이에는 끼움돌(간석)이 있어서 신라시대 정형화된 석탑과 다른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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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탑신석과 상륜부, 탑신석의 전체적 모습은 신라석탑의 형식과 같으나, 

끼움돌(간석)이 있어서 다르며, 상륜부의 모습도 간략화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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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탑과 공양보살상을 향하여 감상하는 탐방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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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앞 공양보살좌상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국가보물 제87호와 제84호로 지정된 강릉시 범일로 신복사터 삼층석탑과 석조공양보살좌상이다. 강릉 신복사는 고려시대 신복사 절터다. 신복사는 조선시대에 발간된 불교관련 문헌에는 전혀 기록이 없어, 창건역사 및 폐사에 대하여는 그 내력을 알수가 없다. 다만 1933년 발간된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 따르면 신라 문성왕 때 명주 사굴산문을 개창한 범일국사(810~889)가 굴산사와 함께 창건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신라시대 후기에는 선종이 유행하였는데, 이때 신라땅에는 9개의 선종가문이 있었는데 이를 구산선문이라고 한다. 당시 구산선문을 열었던 절 중에 하나가 바로 이곳 강릉 굴산사에 본거지를 두어 굴산산문이라고 하였는데 이를 개창한 스님은 범일국사였다. 불교사를 돌아보면 경전위주로 성장하던 시대를 교종불교라하며, 이때는 화엄경을 위주로 공부하고 수행하였다. 한편 선종은 방대한 경전보다는 마음의 깨달음을 구하기 위하여 수행하는 종파인데, 이때는 깨달음을 구하기 위하여 주로 선수행을 위주로 하였다. 따라서 선수행을 위주로 한 종파라 하여 선종이라고 한다.

 

신복사는 1936년 일제강점기에 절터 주변에서 발견된 기와편에 쓰여진 글자에 '신복(神福)'이 있어서 절의 이름을 알게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절을 추정할 만한 유구가 없었기에 절의 이름도 심복사(尋福寺)' 또는 '신복사(神伏寺)'로 알려져 왔었다. 이런 절터의 지표조사를 통하여 절터였음이 알려지고,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위 석탑과 석조보살을 비롯한 건물의 초석과 기단등이 발굴되었다.  신복사의 절배치는 남쪽이 구릉으로 이루어져 절은 북향으로 앉아있는 절로, 석탑의 남쪽에는 정면4칸 측면1칸의 금당건물이 있었으며, 동쪽과 서쪽에는 정면5칸 측면2칸의 각각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문화재발굴조사를 통하여 밝혀진 신복사터는 고려시대 초기에 조성된 절로 탑과 금당을 주축으로 동서에는 회랑을 설치한 절이었으나, 조선시대 어느때인지 폐사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동안 알 수 없었던 자세한 역사는 매우 아쉽지만, 그나마 대행인 것은 고려시대  아름다운 삼층석탑과 공양보살좌상이 거의 온전한 모습으로 땅속에 뭍혀있었기에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어 오늘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 것이다. 신복사터 삼층석탑과 공양보살좌상은 국내 폐사터 중에서 발굴된 유물중에서는 매우 보존상태가 좋은 문화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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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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