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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화엄종 첫 가람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과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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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등록일
2023.06.22 11:08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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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관조명으로 본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과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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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에서 올려보는 사사자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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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안개속에 본 석탑과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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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덕 위에서 본 석탑과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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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개가 자욱한 아침에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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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탑의 대각선 방향 입면, 탑의 전체적인 모습은 불국사석가탑과 비슷하지만, 기단을 벽면처럼 각진 돌로 세우지 않고, 네마리의 사자가 받들고 있는 모습으로 만든 것이 무척 특이하며, 또 그 안에는 인물상이 서있으면서 기둥역할을 하고있다.  또 석탑의 상륜부는 불국사 석가탑과는 달리 매우 간소한 모습을 띄고있다.(왼쪽)  석탑의 옆모습, 탑의 층수는 지붕이 있는 곳을 말한다. 때문에 아랫부분은 층수가 아닌 기단의 층수이기에 탑의 층수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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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탑을 머리에 이고 있는 합장한 채 서있는 조각상은 연기조사의 어머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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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탑의 기단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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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탑의 기단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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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이한 기단의 석등, 기단 안에는 어머니가 서있는 석탑을 향하여 차를 공양하는 연기조사 상이 표현되었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구례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인도에서 온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세운 절로 지리산 깊은 산골짜기에 있는 한국 화엄종의 가장 큰 절이다. 연기조사는 중국이 아닌 인도의 스님이며, 544년은 중국에서도 화엄종이 하나의 종파로 완성되기 이전이다. 그렇다면 이는 신라의 화엄종이 중국에서 발원한 것이 아니고, 인도에서부터 왔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해는 527년 법흥왕때 이차돈이 순교한 때이니 544년은 신라 땅에 불교가 국가에서 승인한지 불과 17년 후의 일이었다. 그러니 불교의 수많은 경전들 가운데서도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화엄사상이 신라 땅에 그리 빨리 들어 왔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기도 하다. 또 이곳 구례는 당시 신라땅이었다고 하지만, 백제에 가까운 땅으로 민감한 분쟁지역이기도 하였다.

 

한편 역사적으로 한국 화엄종의 시조는 토종 원효와 유학파 의상으로 알고 있지만, 이때는 600년  중반을 넘어서다.  원효는 당나라로 유학을 하지 않고도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 등 화엄학에 관한 책을 여러권 저술하였고, 의상은 당나라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해동화엄종의 시조가 되었다고 하지만, 당시 신라, 백제에는 중국의 화엄학을 통하지 않고도 인도에서 들어온 화엄학에 관한 많은 경전들이 있었고, 연기조사가 창건한 화엄사는 이를 공부한 스님들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원효, 의상 이전에 신라에 들어온 연기조사는 지리산 깊은 산골짜기에 절을 짓고 화엄학을 이 땅에 전하였다고 하여 화엄사에는 연기조사와 그의 어머니를 함께 표현한 이 탑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오늘 보는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四獅子三層石塔」은 신라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탑은 그 구성 형식은 불국사 삼층석탑과 같이 기단은 2층이고, 층수는 3층인데, 윗층 기단은 네마리의 사자가  모퉁이에서 기둥이 되어 윗층 탑을 받들고 있고, 그 안에는 연기조사의 어머니상이 합장한 모습으로 이뤄진 탑이다.

 

아랫층 기단에는 4면에 각 3구의 천신상이 조각되어있으며, 1층의 탑신에도 사천왕상과 인왕상 등이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어, 이 탑을 지상과 천상의 세계로 만드는 매우 화려한 장식탑이기도 하다.  탑의 본채인 3개층의 탑신과 지붕돌은 불국사 석가탑과 같은  체감형식, 옥개석의 곡선 및 굽받침과 높이와 폭의 비례감이 황금비율로 보이게 세워져 있지만, 탑을 마무리하는 상륜부는 불국사석가탑 보다는 많이 간략화한 모습이다.

 

이 석탑의 앞에는 3개의 돌기둥 기단이 석등의 본체인  화사석을 받들고 있는 특이한 석등이 있다.  기단부의 가운데에는 한쪽 무릎을 꿇은 사람이 차공양을 올리는 모습의 조각상이 앞에 있는 석탑을 향하고 있는데, 석등의 기단 안에 차공양을 올리는 사람은 연기조사를 표현한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연기조사는 고향 인도를 떠나 신라땅에 화엄불국토를 이루고자 험난한 미지의 길을 거쳐 와서 화엄학을 전파하였기에 고국인 인도로 살아서 다시 돌아갈 수 없었지만, 이국 땅에서 자신을 낳아 길러주신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은 지극히 사무쳤던 것이다.

 

후세들은 그래서 그의 효심을 표현하는 모습을 석탑과 석등에 담아, 연기조사가 어머니께 차공양을 올리는 모습으로 석등에 표현하였고,  공양을 받는 어머니의 모습은 석탑안에 조각상으로 표현한 것으로 전한다.

 

화엄사 각황전 동쪽 언덕 위에 자리잡은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과 특이한 모양의 「석등」은 연기조사와 그의 어머니를 함께 표현하여 화엄사의 창건설화와 창건자에 대한 감동을 느끼게 하는 화엄사의 가장 중요한 문화유적으로 이제는 국보가 되어 보호되고 있다. 연기조사가 화엄사를 창건한 후 300여년 흐른 신라말에 조성된 이 탑과 석등은 오랜세월을 견디는 동안에도 전란에 의한 파손은 되지 않았지만, 비바람과 풍설의 세월로 많이 훼손되었고, 최근 문화재연구소의 정밀안전진단을 거쳐, 완전 해체수리복원를 하여 오늘의 모습이 되었다. 

 

현재 화엄사에는 연기조사를 기리는 암자로 화엄사에서 6km 정도 산길로 올라가면 「연기암」이 있다. 이  밖에도 화엄사에는 금정암, 구층암, 미타암, 남암 등 여러 암자들과  각황전 등 국보 및 보물이 즐비하여 화엄사를 다 보려면 하루종일 머물면서 보아도 턱없이 모자랄 만큼 많은 문화유적이 있다.

 

봄 맞이 홍매화를 보고자 들른 화엄사에서 새롭게 단장한 연기조사와 그의 어머니 설화가 깃든 사사자삼층석탑과  석등을 새벽 자욱한 안개속에 돌아봄으로써 오랜 역사속의 아름다움과 신비함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 조사(祖師)는 불교에서 어떤 종파나 큰 사찰의 시조가 되는 훌륭한 스님을 이르는 존칭으로, 가장 오래된 할아버지 스승이라는 뜻이다. <연기조사>는 화엄사의 최초 할아버지 스승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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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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