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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한 석탑 단양 향산사터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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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9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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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보] 아담한 석탑 단양 향산사터 삼층석탑                         

마을 앞 공원에 팔각정과 함께 서있는 향산사터삼층석탑
▲ 마을 앞 공원에 팔각정과 함께 서있는 향산사터삼층석탑

 



 

잠시 나들이를 마치고 돌아가는 주민
▲ 잠시 나들이를 마치고 돌아가는 주민

 

탑 아래에서 본 모습
▲ 탑 아래에서 본 모습

 

뒤로 마을의 집들과 함께 본 탑의 모습
▲ 뒤로 마을의 집들과 함께 본 탑의 모습

 

옆면에서 본 탑의 모습
▲ 옆면에서 본 탑의 모습

 

탑신과 상륜부 모습
▲ 탑신과 상륜부 모습

 

주변산세와 함께 본 탑의 모습
▲ 주변산세와 함께 본 탑의 모습

 

탑의 정면에서 본 탑의 모습. 1층 탑신에는 오목새김의 문이 있다.
▲ 탑의 정면에서 본 탑의 모습. 1층 탑신에는 오목새김의 문이 있다.

 

최근 복원공사를 마친 한국석탑 최초의 탑인 익산 미륵사지 서쪽석탑, 이 모습은 본래 완전한 모습에서 불교의 탄압과 홀대로, 절이 폐사되고 난 후, 차츰 무너져 내리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그나마 더 이상 무너지지 않도록 당시 첨단기술인 콘크리트로 고정하여 이 모습으로 남을 수 있었다.
▲ 최근 복원공사를 마친 한국석탑 최초의 탑인 익산 미륵사지 서쪽석탑, 이 모습은 본래 완전한 모습에서 불교의 탄압과 홀대로, 절이 폐사되고 난 후, 차츰 무너져 내리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그나마 더 이상 무너지지 않도록 당시 첨단기술인 콘크리트로 고정하여 이 모습으로 남을 수 있었다.

 

익산 미륵사지구층석탑을 추정복원한 동측석탑의 모습, 무너져 내리던 미륵사지 서쪽탑의 모습을 분석하여 추정복원한 모습. 본래의 모습은 그림이나 도면으로 남아있지 않아서 요즈음 종합적 분석으로 추정해서 복원한 것이다.
▲ 익산 미륵사지구층석탑을 추정복원한 동측석탑의 모습, 무너져 내리던 미륵사지 서쪽탑의 모습을 분석하여 추정복원한 모습. 본래의 모습은 그림이나 도면으로 남아있지 않아서 요즈음 종합적 분석으로 추정해서 복원한 것이다.

 

익산 미륵사탑 이후 신라땅에 세워진 최초의 석탑. 신문왕때 세운 감은사석탑. 상부 상륜부가 없어지고, 촬주만 남았다.
▲ 익산 미륵사탑 이후 신라땅에 세워진 최초의 석탑. 신문왕때 세운 감은사석탑. 상부 상륜부가 없어지고, 촬주만 남았다.

 

불국사석가탑. 한국석탑의 완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석탑으로, 석가탑 이후의 많은 탑들은 이 석탑의 비례감을 거의 그대로 모방하였다.
▲ 불국사석가탑. 한국석탑의 완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석탑으로, 석가탑 이후의 많은 탑들은 이 석탑의 비례감을 거의 그대로 모방하였다.

 

 

[글] 충북 단양군 가곡면 향산리에는 신라시대 후기에 조성된 아담한 석탑이 있다. 이 석탑은 불국사 석가탑과 같은 입체적 비례감과 체감이 아름다운 조형미를 갖춘 석탑이나, 그 규모는 불국사탑의 절반정도다.

 

이곳에는 신라시대 처음 불교를 전했다고 전하는 고구려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신라땅에 몰래 들어와 포교하던 중 신라 눌지왕 19년(435)때 부처님을 꿈속에서 만난 뒤 절을 창건하였다. 그리고 그 절이름을 향산사라 하였다. 그러나 묵호자가 불교를 신라땅에 전하였으나 당시에는 생소하고 이상한 이교로 신라왕실로부터 탄압받아 정식으로 포교도 하지 못하였다. 

 

그뒤 묵호자가 입적한 뒤 불교가 공인되고, 그의 뜻을 이어받은 후대의 스님들이 이곳에 절을 세우고 탑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어떤 연유로 모셔온 것인지 몰라도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였다. 당시 탑이란 법당의 앞을 아름답게 꾸미는 장식품이 아니라 부처님의 유골인 사리를 모시기 위한 최고의 조형물이었다.

 

향산사는 그런 유래를 간직한 신라시대 창건된 고찰로 창건이래 800년 이상을 유지한 뒤 조선시대 최대 국난인 임진왜란때 전란의 와중에 전각은 모두 불타버렸고, 이 삼층석탑만이 외롭게 남겨졌다. 절이 없어진 뒤 이곳에는 사람들이 들어와 터를 잡고 농사를 지으며 살기 시작하였고 법당이 있던 곳에는 이들이 살아갈 집이 들어서 마을이 되었지만, 이 석탑만은 헐리지 않고 또 큰 손상을 피한채 굳건히 서있으면서, 이곳이 예전에는 큰 절터였음을 증명하였다.

 

그런데 조선이 멸망하고 다시 일제강점기를 거친 뒤, 석탑에 사리를 모셨다는 것을 알게된 문화재도굴꾼들이 도굴대상을 찾던 중, 마을 가운데 있는 이 탑에도 탐욕의 손길이 뻗쳤다. 이들은 대담하게도 마을 중간에 있는 이 탑을 무너뜨리고 탑신에 모셔졌던 사리장엄구를 훔쳐가 버렸다. 그래서 향산사의 사리는 사라지고 말았다.

 

탑이 무너진 뒤 마을사람들은 사리가 없어진 빈탑을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리는 사라졌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많은 전란 중에도 탑의 전체모습으로나 부분적으로 탑신 옥개석 등을 볼 때, 깨진 곳이 없이 보존되고 있음이다. 향산사터삼층석탑은 지금 마을 가운데 공원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그 모습이 아름답고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어 보물 제405호로 지정되었다.

 

이 탑을 자세히 살펴보면, 앞에 말한 것 처럼, 그 전체 모습은 신라석탑의 전형인 불국사석가탑과 같은 아름다움을 갖춘 석탑이나, 다른 점은 탑의 맨 꼭대기에 있는 상륜부가 불국사석가탑의 복잡한 상륜부 장식과는 달리 연꽃봉우리로 간략하게 마무리한 것이다. 현재의 상륜부모습이 본래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또 땅과 맞닿은 탑의 맨 아랫부분은 지대석이 놓였고, 지대석 위에는 위 아래로 2단의 기단이 있으며, 기단 위에는 탑의 본채인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이 놓여있다. 그중 1층의 탑의 정면 부분에 탑신에는 문모양 오목새김이 있어, 이 문을 통해 극락으로 들어가는 문임을 형상화하였다. 탑에 모신 사리가 있었다면 아마도 이곳에 모셔졌을 것이다.

 

향산사의 유래가 신라에 처음 불교를 전해준 묵호자(고구려스님)와 닿았고, 그의 뜻을 이어받는 후대스님들이 탑을 세웠다고는 하지만, 이 탑은 신라 중기가 아닌 신라 후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신라의 석탑은 처음에는 백제의 익산 미륵사탑을 모방하여 신문왕(?~692)때 세운 경주  감은사삼층석탑이 처음이었고, 차츰 정리되어 불국사석가탑(불국사 창건년대 752~774)으로 완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륵사터 석탑의 형식은 유지하면서도, 석탑의 층수도 줄고 석탑의 규모가 작아진 대신 그 미학적 완성은 높아졌다. 불국사석가탑이 완성 된 이후로는 신라땅 전국에 걸쳐 불국사 석가탑 양식의 석탑들이 많이 들어서 불국사 석가탑은 신라탑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신라땅을 온통 불국토로 만들어갔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 석탑의 양식에 변화가 생겨나고, 석탑이 장식적으로 변하면서 그 크기도 작아지는 과정을 거쳐 이곳 향산사지석탑으로도 변한 것으로 보아야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탑의 흐름을 역사적 검토해 본 결과 향산사지삼층석탑은 그 크기는 작지만 신라 후기에 불국사석가탑의 특징을 그대로 계승한 신라후기에 세워진 석탑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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