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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 일연선사의 삼국유사 집필지 군위 인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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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2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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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세워진 인각사 극락전
▲ 근래 세워진 인각사 극락전

 

인각사 극락전 앞 삼층석탑, 석탑의 뒤로는 국사전(보각국사 일연선사를 모심)
▲ 인각사 극락전 앞 삼층석탑, 석탑의 뒤로는 국사전(보각국사 일연선사를 모심)

 

극락전 앞 삼층석탑
▲ 극락전 앞 삼층석탑

 

삼층석탑을 중심으로 요사채와 극락전이 있다.
▲ 삼층석탑을 중심으로 요사채와 극락전이 있다.

 

최근에 지어진 인각사 극락전, 전체 대지상 위치도 잘 정해지지 않아보이고, 기둥부와 지붕부의 비례도 맞지 않아 건축물의 안정감도 떨어져 아쉽다.
▲ 최근에 지어진 인각사 극락전, 전체 대지상 위치도 잘 정해지지 않아보이고, 기둥부와 지붕부의 비례도 맞지 않아 건축물의 안정감도 떨어져 아쉽다.

 

보각국사 일연선사의 행적을 기록했던 비석을 보호하는 보호각, 훼손된 비석이지만 이를 보호하기 위하여 보호각을 지었다.
▲ 보각국사 일연선사의 행적을 기록했던 비석을 보호하는 보호각, 훼손된 비석이지만 이를 보호하기 위하여 보호각을 지었다.

 

보호각내 보각국사 비석, 무슨 원한이 있었는지, 비석을 깨고, 글자를 쪼아내어 비석의 글을 전혀 알 수 없도록 깨부셨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불교에 대한 배척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단편적으로 알 수 있는 증거로 생각된다.
▲ 보호각내 보각국사 비석, 무슨 원한이 있었는지, 비석을 깨고, 글자를 쪼아내어 비석의 글을 전혀 알 수 없도록 깨부셨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불교에 대한 배척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단편적으로 알 수 있는 증거로 생각된다.

 

보각국사 일연스님의 사리를 모신 승탑, 대좌 탑신 옥개석 3단으로 이루어진 승탑은 평면이 팔각형이고, 목조건축물처럼 지붕은 기와지붕의 형태를 약화시켜 조성하였다. 이런 형태는 고려시대 승탑의 전형이다.
▲ 보각국사 일연스님의 사리를 모신 승탑, 대좌 탑신 옥개석 3단으로 이루어진 승탑은 평면이 팔각형이고, 목조건축물처럼 지붕은 기와지붕의 형태를 약화시켜 조성하였다. 이런 형태는 고려시대 승탑의 전형이다.

 

승탑의 주변에 새겨진 동물 그림들
▲ 승탑의 주변에 새겨진 동물 그림들

 

일연선사를 모신 국사전
▲ 일연선사를 모신 국사전

 

국사전 내 최근에 그린 일연선사 초상
▲ 국사전 내 최근에 그린 일연선사 초상

 

깨부신 일연선사의 행적비를 깨지기 전 탁본을 그대로 다시 새겨 세운 모습
▲ 깨부신 일연선사의 행적비를 깨지기 전 탁본을 그대로 다시 새겨 세운 모습

 

비석의 옆모습
▲ 비석의 옆모습

 

인각사터에서 발굴된 석조유물들을 모아놓은 모습
▲ 인각사터에서 발굴된 석조유물들을 모아놓은 모습

 

모아놓은 유구 가운데 석등의 대좌로 추정되는 유구
▲ 모아놓은 유구 가운데 석등의 대좌로 추정되는 유구

 

다양한 모습의 석조유구들
▲ 다양한 모습의 석조유구들

 

인각사터에서 출토된 건축물의 주춧돌 기단석 등 석물들
▲ 인각사터에서 출토된 건축물의 주춧돌 기단석 등 석물들

 

인각사터 발굴과정에 출토된 맷돌
▲ 인각사터 발굴과정에 출토된 맷돌

 

인각사터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정안수를 담아두었던 청동정병, 정병 속 정안수는 관세음보살이 중생의 병을 치료할 때 쓰는 만병통치약수로 고려불화에는 늘 등장하는 수지품이다.
▲ 인각사터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정안수를 담아두었던 청동정병, 정병 속 정안수는 관세음보살이 중생의 병을 치료할 때 쓰는 만병통치약수로 고려불화에는 늘 등장하는 수지품이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북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에 위치한 인각사는 삼국의 통일기에 건립된 고찰이다.  인각사 창건기에 따르면 선덕여왕 12년(643년),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그보다 1년 전인 선덕여왕 11년(643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이후 인각사는 구산선문의 가지산문의 사찰로 고려후기 크게 번창하였다.

 

인각사가 크게 번창한 때는 고려 충렬왕 10년(1284년), 일연선사가 이곳에 주석하면서 부터다. 이때 선종의 9개 종파의 대표적 본찰인 구산선문의 대표들이 모여 전체회의를 2회에 걸쳐 열었고, 이후 인각사는 선종사찰의 중심이 되었다. 5년 뒤 충렬왕 15년(1289년) 일연선사가 입적하자 보각(普覺)이라는 시호와 정조(靜照)라는 탑호를 내렸고, 당시 문호였던 '민지'가 비문을 쓰고, 글자는 당대 최고로 여기던 왕희지의 글씨를 책속에서 집자하여 새겼다고 한다. 일연선사는 인각사에 주석하면서 한민족의 고대사를 정리하여 우리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자세히 기록하였다.

 

삼국유사가 저술되기 전에도 한민족의 유래를 단편적으로 밝힌 책들은 많이 있었으나, 당시 유학자였던 김부식은 한민족의 고대사를 정리하면서 중국을 숭상하는 사대적 역사관으로 우리고대사를 축소시켜 삼국사기를 지었다. 삼국사기에는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 중 중국과 비견되는 부분은 모조리 빼버려, 한민족은 중국에 비할 바 없는 약소민족임을 자임했던 것이다. 이를 본 일연스님은 당시 흩어져 있던 많은 고대사의 자료를 수집하여, 저술의 근거를 밝히면서 한민족의 근원인 중국에 비해서 뒤지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단군의 역사부터 저술하였다. 삼국유사는 고조선, 삼한, 부여, 구구려, 백제, 신라, 가야, 그리고  후삼국의 흥망를 다루었고, 신라를 중심으로 불교의 전래와 유래, 고승들의 행적 등을 기록하였다.

 

이 삼국유사는 5권 2책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일연스님께서 쓴 책은 전하지 않고, 또 고려시대 출간된 책은 없고, 1512년 조선 중종 7년 경주부사 이계복에 의하여 간행된 책이 현재 최고본으로 전하고 있다. 그렇게 삼국유사가 모조리 사라지게 된 이유는 조선시대 우리 고유 역사를 밝혔던 많은 책들을 모조리 거두어서 소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이계복이 간행한 책이 있으며 이후 신간본으로는 우리 역사에도 관심이 많았던 일인학자들에 의해 1908년 일본 도쿄대학에서 출간한 것이 가장 오래되었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우리민족의 연원을 밝힌 매우 체계적인 책으로 불교를 따르는 스님이 불교관련 스님들의 행적과 민족고유의 많은 설화와 이야기들이 들어있다고하여 역사학계에서는 정사가 아닌 설화로 보는 경향이 있어왔다.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저술한 까닭은 사대주의적 역사관에 쓰여진 삼국사기를 비판하고, 몽골의 간섭기를 당하여 우리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밝힘으로 고난기에 좌절속에 살던 사람들에게 민족적 긍지를 잃지 않고 국난극복의 힘을 얻기 위함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유서깊은 책이 쓰여진 곳이, 바로 이곳 인각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인각사는 이후 고려가 기울고 조선조에 불교의 탄압기에 이르러 자꾸만 축소되어갔다. 1406년 태종 6년 전국의 수많은 절 중 242개 사찰만 공인하였는데 그때 인각사는 제외되었고, 차츰 절의 위상이 떨어져 갔다. 1555년 명종 10년에는 성리학을 추앙하는사림들의 번창으로 전국 산좋고 물조은 곳에 많은 서원들이 들어서는 가운데, 인각사 인근 지역인 영천에는 고려시대 말 신진유학자인 정몽주를 따르던 선비들이 세운 임고서원이 들어서고 그 임고서원에 임금이 현판을 써주는 은혜를 베푸는 사액을 하면서, 그동안 인각사의 재정적 바탕이던 전답들을 모두 임고서원에 주어버렸다. 이후 재정적 바탕을 잃은 인각사는 명맥을 잇기도 힘에 겨웠고, 이후 1592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인각사는 그나마 모든 전각마저 전소되고 말았다. 임진왜란 이후 인각사가 다시 중건되기는 하였으나, 옛 영화는 다시 찾지 못하고 전각들이 있던 곳은 논 밭이된 채 겨우 이름만 이어왔다.

 

임진왜란 이후 290여년이 지난 1890년 인각사는 또 다시 큰 훼손을 당하였다. 고종 27년 보각국사 일연선사의 승탑의 위치가  풍수가들에 의해 명당으로 지목되자, 당시 권세가 였던 황보씨 집안에서는 그자리에 자신들의 조상묘를 쓰고 발복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황보씨 집안에 의하여 보각국사의 비와 승탑을 파괴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스님들은 그런 고난 속에서도 인각사를 이어왔고, 일제강점기이후 영천 은해사의 말사로 소속되어 오늘에 이른다.

 

일제강점기를 극복하고 2000년대 이르러 인각사터를 발굴조사 한 결과, 넓은 터에서는 수많은 기둥초석과 기단 등 석조유구와 불교의식에 쓰이던 청동용품과 각종 그릇 기와 등이 발굴되었으며, 보각국사의 승탑과 탑비는 깨어지고 조각난 모습 그대로 보물 제428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게 되었다. 이제 그 터에 새로지은 전각이 들어섰으나. 그 격식없는 건물들의 모습과, 아무런 계획도 없이 배치된 건물들의 무질서는 그 찬란했던 역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한데 모아 놓은 기단석, 주춧돌, 그리고 각종 석재조각들은 그동안 얼마나 큰 수난의 역사를 겪어왔는지 최소한의 짐작자료일 뿐이었다.

 

이제 특단의 대책이 없이는 인각사의 본래 모습으로 복원하기는 불가하게 되었지만, 불교건축을 설계하고 연구하는 기자의 입장으로 볼 때,  다시 짓는 전각들이나마, 격식에 맞는 구성과 비례로 짓고, 전체적으로 사찰배치에 대한 종합계획을 세워서 하나씩 건물을 지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절은 건물하나 하나도 중요하지만, 전각과 전각사이에 위계질서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지어진 건물들은 그 위치도 어울리지 않을 뿐아니라, 건물의 균형과 비례마저도 전통한옥의 멋에 잘 맞지 않아보였다.  사찰내 건축물들은 주전각과 보조전각 그리고 요사채 등의 건물들이 서로 위계질서를 이루면서 주변 지형과도 조화가 잘 갖추어져야 하는 것이며, 그렇게 될 때 많은 사람들이 찾아도 마음의 위안을 받을 수 있고,  보기에도 좋은 불국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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