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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법화종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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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8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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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불교법화종의 역사  


 지난 몇 달에 걸쳐 소승이 대한불교법화종단의 제2의 도약을 발원하면서 몇 번에 걸쳐 종단의 안정사를 비롯한 전통사찰을 답사하고 법화종단의 안정과 화합을 발원하였다.

 앞으로 소승이 2013년 계사년 대한불교법화종 원동계 수계산림법회를 부산 흥국사에서 2박3일 동안 강주로 강의한 내용인 『근·현대한국법화사연구』 「대한불교법화종의 성립을 중심으로」에서 법화종 성립의 사상적 배경과 법화종의 교학체계 그리고 법화종의 의례와 수행을  아래와 같이 연재하고자한다.


 印度佛敎史에서 본다면 佛滅後 여러 번의 結集을 통하여 여러 부파가 성립하였다. 즉 1차 결집 때에 이상적인 계율과 현실과의 괴리, 즉 十事非法 내지 大天五事의 문제로 인한 상좌부와 대중부의 분열이 있었고, 그것을 시작으로 20여 부파가 相存했던 부파불교시대를 거치면서 기존의 小乘佛敎를 대체할 大乘佛敎라는 새로운 불교의 흐름이 대두되었다. 대승불교 또한 대중들로부터 멀어져가면서 또 따른 불교로서 密敎가 등장한다. 이와 같은 불교의 역사를 통해서 보면 불교는 그 철학적 요소에 못지않게 대중들에게 얼마나 호응을 갖는가에 따른 종교적 요소가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철학적 요소와 종교적 요소가 함께하는 양적인 성장과 질적인 성장의 균형 있는 발전의 흐름이라 할 수 있으며, 그 흐름을 지니고 있는 불교가 기원 전후부터 중국에 전래되었다.


 중국에서는 인도불교의 學派佛敎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는데 중국불교의 주된 특징으로 주저 없이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宗派佛敎이다. 이 종파불교는 철학적 요소와 종교적 요소가 어우러져 중국불교에서 비롯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종파는 서로의 교학과 수행의 독자성을 가지고 비록 동일하지 않지만 석존의 깨달음을 올바로 파악하는 이른바 諸法의 緣起的 實相을 깨달아 成佛에 이르고 다시 중생에게로 廻向하는 것을 지상의 과제로 여기고 정진하는 점에 있어서 동일하다. 즉 다양한 相의 모습이 시대적⋅지역적 요청에 따른 종파로 나타났으며, 질적인 성장과 양적인 성장을 함께 도모하는 균형 있는 발전의 흐름이 그 맥을 이어간 것이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해진 불교는 기존의 토착 종교와 경쟁 내지 협력의 관계 속에서 많은 종파가 盛衰하였고, 수와 당대에 이르러서는 문화와 사상의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 東漢에서부터 隋와 唐을 거치는 동안 중국불교에 성립된 종파로는 三論宗⋅唯識宗⋅天台宗⋅華嚴宗⋅淨土宗⋅禪宗⋅律宗⋅密宗 등이 있다. 이들을 일반적으로 중국불교의 8宗이라 부른다. 여기에다 소승불교의 종파로서 남북조시대에 형성된 毘曇宗과 成實宗을 더하면 10宗이 된다. 이 밖에도 대승불교의 종파로서 남북조에 형성된 地論宗⋅攝論宗⋅涅槃宗을 합치면 13개 종파가 된다. 또한 당 현장이 인도에서 가져온 "俱舍論“을 한역한 후에 성립된 소승불교의 俱舍宗까지 합치면 중국불교에는 14개의 종파가 있게 된다.

 

 이처럼 중국으로 전래된 불교가 土着 宗敎의 기세에도 불구하고 문화나 사상적인 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데는 수많은 經典을 漢譯하거나 傳法⋅敎化한 高僧 뿐 만 아니라 불교를 토착화하려는 이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 의해서 그때까지의 경전 번역과 더 나아가 講說과 註釋 작업 등 각종 불교 저술을 통한 불교의 발전은 자연스럽게 종파불교로서 전개되어 갔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불교만의 역사가 아니라 간혹 종교와 정치가 함께하는 국가적 특성상 정치 지도자나 與權의 성향에 따라 종파의 興亡이 左之右之된 적이 있었다. 정치지도자에 의한 奉佛과 廢佛은 해당시기 불교의 흥망을 결정지었다. 그 중 폐불의 대표적 예 가운데 하나가 法難이라는 종교탄압이며, 중국불교 역사에서도 이른바 三武一宗厄이라 하여 네 차례의 대표적인 불교박해의 역사가 있었다. 즉 北魏 武帝의 태평 진군 7년(446) 불경과 불상 등을 불사르고, 승려들을 묻어 죽인 것, 北周 무제의 건덕 3년(574) 도교와 불교를 폐지하고, 사원 4만여 區를 王公에게 주고, 승려⋅도사 4만여 인을 군민에 충당한 일, 당나라 武宗의 회창 3년(834) 절 4만여구를 헐어버리고, 승려 26만인을 환속시킨 것, 後周 世宗의 현덕 2년(955) 승니를 사사로 得道시키는 것을 금하여 부모를 모실 이가 없는 사람의 출가를 허락지 않고, 나라에서 준 간판이 없는 사찰을 폐하고, 銅像⋅鐘磬을 녹여서 돈을 만든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법난이 언제나 당해 종교의 外的 요인으로 인해 발생되는 것만은 아니다. 당시 불교사원의 소유 토지의 증가로 국가재정의 궁핍문제와 승려의 부패와 타락, 사이비 승려문제 등 여러 가지 內的 문제가 정치적 헤게모니를 잡은 세력에 의해서 廢佛 내지 毁釋을 강행하게끔 된 것이다. 더구나 이와 같은 법난보다도 오히려 더 심각하게 불교 전체에 악영향을 끼친 것이 바로 경쟁 관계에 있는 종교의 의도적이면서 정치적인 崇尙으로 인한 불교의 배격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경우 武宗代의 상황으로 도교신앙을 통한 불교탄압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법난 내지 탄압의 결과에서 가장 우려스러운 일이 바로 法脈의 단절이라 할 것이다. 즉 종파의 특성상 어떤 사상의 흐름이 후대에까지 이어져 그 사상이나 先祖의 가르침을 계승하는 것인데, 여기에 外部的인 要因인 政治的인 外壓으로 인한 그 흐름의 단절은 당해 종파의 사상과 법맥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중국의 종파불교는 철학적 요소와 종교적 요소 외에 외부적인 사회적 요소에 의해 그 흐름이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한국불교에서 불교는 어떻게 전개되어 갔는가?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한국불교는 당시에 모든 분야에서 선진국이었던 중국의 여러 종파불교를 접하면서 자연히 그 흐름이 이어졌으나 世宗6(1424)년 모든 종파들이 禪⋅敎  兩宗으로 통합되고 또한 西山大師 이후 禪 중심의 禪佛敎의 특징을 유지하면서 通佛敎的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불교가 한반도에 전래된 뒤에 불교가 갖는 철학적 요소와 종교적 요소, 그리고 중국불교에서 보였듯이 사회적 요소가 종파에 전개에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현재까지 한 종파에 국한하지 않고 불교 전체에 두루 하는 通佛敎的 성격은 한국불교 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해방 이후 현재 한국에는 대한불교 조계종을 비롯한 한국불교 태고종, 대한불교 천태종 및 대한불교 진각종 그리고 대한불교 법화종 등 여러 종파가 있다. 최근까지 등록된 불교계통 종단의 수는 수백여 개 종파에 이른다. 과거 찬란했던 신라⋅고려시대의 불교와는 다른 양상이지만 수많은 종파의 성립은 각각 장⋅단점을 지니고 있다. 각 종파마다 교학과 수행에 다른 장점을 지니면서 중생교화를 할 때에 복잡다단한 현대사회를 이끌어갈 정신적 리더로서 기능할 수 있으나, 너무 많은 종단의 난립은 불교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켜 오히려 중생제도에 역효과를 유발할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여러 종파가 우후죽순격으로 난립하는 이 시대에 종파의 성립이 종단 내외의 불교외적 요인으로 성립한 것이 아니라, 自宗派의 뚜렷한 교학과 수행체계와 역사에 근거하여 성립되었다는 종파의 정통성과 정체성 확립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지금까지 국내 불교계 종파의 역사에 대하여 연구한 내용은 대한불교 조계종이 독보적이며, 태고종과 천태종에서도 각각 "태고종사"와 "천태종사"의 발간을 시작으로 그 종단의 정통성 확립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 외에 종단의 역사나 종파의 교학에 대하여 밝힌 곳은 아직까지 없으며, 특히 한국 4대 종단에 포함되지 않는 군소종단의 입장에서는 요원한 일이다. 


 대한불교 법화종[이하 법화종으로 약칭]은 이러한 한국불교의 현실에서 주목할 만한 종파이다.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법화사상이 신라와 고려에서 크게 성하였고, 조선조 이후 억불 내지 법난의 영향으로 쇠퇴일로를 걷는 와중에서도 백성들의 신앙으로 그 전통이 계승되었다. 이러한 숨은 전통이 드디어 해방을 계기로 새로운 불교운동으로 전개되는데, 그것이 1945년에 발족한 ‘대승불교법화회’이다. 이 모임의 발족으로 조선조에서 등한시되었던 지의대사와 대각국사의 천태법화사상이 그 맥을 연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대승불교법화회’로부터 그러한 천태법화사상의 현대적 계승이라는 제반의 노력을 찾아볼 수 있으며, 또 그러한 노력을 통한 결과가 ‘대한불교 법화종’이라는 종단의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천태법화사상의 현대적 계승의 단초라 할 수 있는 ‘대승불교법화회’를 통하여 우리나라 천태법화사상의 맥이 이어졌음을 파악해 볼 수 있을 것이며, 그 원류는 이 땅에 오래전부터 전해졌던 "법화경"을 중심으로 한 사상적 흐름이라 할 수 있다. 법화종은 그 흐름의 진정한 계승자이며, 더 이상 군소종단에 머무르지 않는 종파의 역사성과 독자성을 지니고 있는 종파인 것이다. 


  법화종이 성립되기까지의 사상사적 배경을 밝힘으로서 법화종이 어떻게 성립되었는지 고찰하고, 법화종의 교학체계와 수행⋅의례가 일반 통불교와 어떻게 같고 다른지를 분명히 확립하며, 이를 통하여 법화종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향후 한국불교 안에서 경쟁⋅대립적 종단이 아닌 화합⋅회통의 종단으로서의 미래사회에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할 법화종의 위상과 역할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이상의 목적을 구현하기 위하여 다음의 네 갈래로 구분하여 논지를 전개할 것이다. 

먼저 Ⅱ장에서는 법화종의 성립에 관한 것으로 본종의 소의경전인 "법화경"이 한반도로 전해져서 삼국에서 전개된 양상을 알아볼 것이다. 


 고려시대로 장을 바꾸어서 諦觀의 천태사교의를 비롯하여 대각국사 의천이 한국의 천태종을 개종할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천태종 개종의 역사적 의의를 조명해 볼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고려시대의 찬란한 불교문화 속에 "법화경"에 나타난 각 법화사상가들을 살펴본다. 


 다시 말하면 중국으로부터 전래 된 천태종이 고려대에 이르러 굳건한 종단으로서 정착하게 되는데, 우선 중국에서 천태종을 창종한 지의의 사상을 이어 받아 의천이 고려에서 천태종을 세우게 되고, 이후 여러 천태법화사상가들에 의한 사상의 전개와 그 실천이 뒤따르게 된다. 


 그리고 조선시대에서는 抑佛정책 속에 나타난 "법화경"을 통한 수행과 삶속에 파고드는 법화신앙을 살펴볼 것이다. 조선조에서 외형적으로는 억불정책으로 유교를 받들었으나 조정이나 일반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뿌리 깊게 이어져 온 불교사상의 신봉과 각종 의례 등의 국가적 시행에서 나타난다. 이 사실은 정치적으로나 불교사적으로 대단히 큰 의의를 갖는다. 이른바 會三歸一의 一佛乘으로 제반의 모든 정치적 이념이나 불교의 종파를 하나로 묶는 화합을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법화경"은 

한반도에 수용된 이후 그 사상적 흐름이 활기차게 흘러오다가 조선조의 불교 전반에 걸친 억불 속에서도 그 흐름이 끊이지 않은 채 전래되어, 해방 이후 마침내 한국 내에서 찬란했던 법화사상을 다시 부활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된다. 즉 여러 법화계열 종단이 해방 후 성립되고 그 중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종단이 바로 법화종인 것이다. 따라서 Ⅱ장의 마지막 절에서는 법화종의 창종에 관한 역사적 당위성, 즉 사회적 요소와 관련된 법화종의 성격을 밝힐 것이다. 이를 통해서 법화종이 한국에서 진정한 법화사상의 전수 종단이며 동시에 현재까지도 면면히 법화사상을 발전시켜온 종단임을 입증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삼국시대부터 전승된 천태⋅법화사상의 흐름 가운데에서 元曉⋅諦觀⋅義天⋅諸思想家에 이르기까지의 법화사상을 분석하면서 후일 법화종 성립의 사상사적 근거를 살펴본다. 


 Ⅲ장은 법화종의 철학적 요소인 교학체계에 관한 고찰이다. 앞 장에서 살펴본 법화사상의 맥을 법화종의 혜일이 계승하였으며, 그 근거로써 "법화경"을 비롯한 여러 교학을 분석하고자 한다. 먼저 법화종의 소의경전인 "法華經"⋅"法華宗要"⋅"天台四敎儀"를 통하여 천태교학이 전면적으로 수용되었으며 법화사상을 계승하였음을 밝히고자 한다. 나아가 법화종만의 독립된 교학전적이라 할 수 있는 "法華宗宗要"에 관해서 그 서적의 편찬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 및 종단사적 의의를 집중 조명해 볼 것이다. 이를 통하여 법화종이 고려대로부터 전승되어 온 천태법화사상의 진정한 법맥이라는 것을 주장할 것이다.


 다음 Ⅳ장에서는 법화종의 종교적 요소로서 수행과 의례를 살펴볼 것이다. 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불교 교학은 물론 국가적 차원에서 크게 성하였으나 불교의례⋅의식이 조선조를 거치면서 정책적인 불교 탄압의 결과 불교 교학은 물론 교단의 활동도 쇠퇴하였으며, 그 결과 일반 민중을 대상으로 한 불교의 의례⋅의식화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러한 교학이 아닌 의례화된 한국불교에서 근대에 들어와 ‘불교 의례⋅의식집’이 편찬되는데, "범음집"⋅"작법귀감"⋅"동음집" 등이 편찬된다. 특히 19세기 말엽 백파 긍선에 의해 편찬된 "작법귀감"은 각 종파와 사암에서 벌어지는 의례⋅의식의 최초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근대에 와서 1931년 안진호스님에 의해 편찬된 "석문의범"은 특성상 범패의 기능보다는 기존에 각 사찰별로 전해지고 있던 것을 재편성하여 편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와 같은 기존의 의례⋅의식집과는 별도로 편찬된 법화종만의 법요집인 "법화의범"을 중심으로 기존의 의식과 비교분석을 통한 법화종의 의례와 수행에 관해서 알아보고, 또한 현대에 들어서 天台智顗의 "法華三昧懺儀"를 분석하여 법화종의 독특한 懺法을 살피고자 한다. 즉 "法華三昧懺儀"을 통한 전통적 법화참법에 부가된 법화종만의 독특한 수행의 요소를 살펴볼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간행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법화종의 독자적 수행법을 밝히고자 한다. 그래서 불교 역사에서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는 조선시대와 해방 전후의 한국불교의 현실을 살펴봄으로써 법화종의 의례 및 의식의 독자적 근거를 찾고자 한다.


 또한 신라이후의 우리나라 불교 종단의 공통점이라고 볼 수 있는 밀교적 요소를 십계만다라에서 찾아봄으로써 교학이나 의식 및 수행적 측면에서 그 특이성을 확인하며, 마지막으로 圓頓戒를 살펴봄으로써 법화종의 戒律을 통한 생활불교적인 요소를 찾아볼 것이다.

요약한다면 법화종의 史的⋅敎學的⋅修行的 측면에서 신라로부터 시작되었던 한국 불교의 역사에서 "法華經"이 한반도로 전래되고 고려대에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진정한 법화사상을 근거로 하나의 종파가 생겨난다. 이 사실은 신라의 원효로부터 해방 후 혜일대종사에 이르기까지 법화사상의 間斷없는 계승을 의미한다. 즉 ‘대한불교법화회’로부터 시작된 한국 법화사상의 진정한 계승 종단인 법화종의 창종과 그 창종자인 혜일의 사상적 계승 노력 및 법화종의 소의경론, 법화종의 종체에 관한 제반사항과 "법화의범"과 "법화삼매참의"를 통한 수행과 의례 측면에서 법화종의 과거와 현재의 진면목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Ⅴ장에서는 법화종이 미래지향적 종단으로 한국불교에서 그 위치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 반드시 추진되어야 할 법화계열 종단의 통합에 관한 논자의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대승불교법화회 이후 여러 번의 종단통합과 분열을 거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는 법화계열의 종단들은 그 뿌리가 대승불교법화회에 있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분열된 종단이 하나의 근본을 저버리지 않고 나름의 특성을 가지면서 발전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한국법화사상의 중흥을 이룰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법화사상의 진정한 계승 종단으로서 법화종의 현재 상황에 대한 객관적 인식과 법화사상의 미래지향적 수용과 적용을 통한 진일보한 종단으로서 앞으로의 방향에 관하여 심도 있는 본 논자의 의견을 서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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