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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속에 숨겨진 비밀 "장사상륙작전" 위령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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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3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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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덕불교사암연합회(회장 현담스님)는 9월 5일 한국전쟁 당시 펼쳐진 장사상륙작전에서 희생된 참전용사들을 기리는 위령재를 영덕 장사리해수욕장 내 위령탑에서 장사상륙참전유격동지회 회원 및 연합회 회원 스님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제 40회 장사 상륙작전 전몰용사 합동 위령제”를 봉행했습니다.

 

순국 용사들의 넋을 위로한 이날 위령제에서 영덕불교사암연합장 현담 스님은 “순국한 참전용사 영가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살아계신 유격동지 회원들의 건강과 가정의 행복을 같이 기원하는 의미에서 해마다 봉행해 오고 있다.”면서 “오늘 우리가 평화와 안녕을 누리는 것도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 덕분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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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사암연합회 회장 현담스님(서남사 주지) 인사말

장사상륙작전 위령재와 기념식을 같이 봉행했다가 위령재와 기념제를 따로 봉행하게 되었습니다.  장사상륙작전 기념식은 군에서 주관하게 되어 축제 분위기로 이루어지며 위령재는 스님의 염원 속에서 위령재가 봉행되고 있습니다.


올해는 40주년을 맞이하여 문산호가 개방되는 해 이기도 하고 더불어 돌아가신 영령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살아계시는 분들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정을 발원하는 위령재가 되었습니다. 


지역에 사는 수행자의 한 사람으로서 영덕 군민이 장사 상륙작전 기념식에 동참하는 마음과 같이 위령재도 불자와 군민들의 염원이 필요한 때라 생각합니다.


영덕 군민뿐만 아니라 전국의 불자 여러분들의 장사상륙작전 위령재에 많은 동참 부탁드립니다.


장사 상륙작전 위령재는 매년 9월 14일 봉행이 됩니다.

많은 불자님의 관심 부탁드립니다.


 

▶장사 상륙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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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속에 숨겨진 비밀 장사상륙작전 

 

낙동강 방어선을 점령하지 못하도록 북한군의 거점인 동해안 영덕지구로 상륙하여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한국군의 작전을 유리하게 하라. -육군본부 작전 제 174호-

 

“적의 측방을 기습하여 얻는 전과는 적의 전면에서의 승리보다 더 큰 승리를 한 것이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치열한 전투만이 되풀이 되고 있을 때 맥아더사령관은 일시에 적을 포착 섬멸시키기 위해서는 육전보다는 해상을 이용해 적 배후를 찔러 중요 보급로를 차단시키는 것이 더욱 손쉽고 효과적이라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맥아더장군의 원칙 아래 260여척의 함정과 수만의 장병을 동원하여 가능하면 적이 예상치 않는 장소와 시일을 택하여 기습상륙을 감행한다면 그 효과야말로 아군의 손실도 적을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르는 전과도 또한 막대할 것이고 전쟁의 종결도 단축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방대한 작전계획 수립자들은 작전을 실천하기에 앞서 여러 가지로 은폐 방책을 강구하였으며, 병력집결과 물자선적 등을 비밀리에 행한 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적은 그들이 정보망을 통해 UN군과 국군이 부산에 집결하여 승선하는 것을 이미 탐지하고 어느 지점에 상륙한다는 것은 예상하였으리라고 믿으나 확실한 일시와 장소는 미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이야말로 UN군 측의 기만정책이 크게 그 효용을 발휘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 이다. 

 

장사동이란 곳은 동해안 포항 북쪽 약 25km지점의 좁은 해안에 위치한 작은 어촌으로서 서남북의 삼면은 산악으로 둘러싸인 분지이고 남방의 지경동 고지와 북쪽의 부흥동 고지는 해발 200m이며 적은 양고지의 해안이 험난한 암초로 된 산기슭에 집결하여 방어 진지를 굳게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인천에 UN군이 상륙하기 (인천 상륙작전)직전이므로 반대편인 동해안에서는 기습상륙을 감행하여 적을 견제하면서 경인 지구에 대한 적군의 증원을 방해하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장사 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 전날인 9월 14일 작전을 개시하는 것이 하달되었다.”

작전시간이 정해진 이유는 인천상륙작전시 적의 신속한 대응을 늦추려는 양동작전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1950년 9월 13일 제 95.2기동함대의 엄호와 구축함의 호송을 받은 한국해군의 수송선인 LST 문산호(징발선)은 학도의용군 중심으로 구성된 772명을 승선시킨 후 부산을 출항하여 다음 날 14일 오전에는 이미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문선함에 승선 772명의 학도의용군은 육군본부 독립 유격부대에 속한 유격총사령부 예하 “독립 제1유격대대이다. 

 

제1 유격대대는 1950년 8월 24일 이명흠 대위가 대구역 광장에서 학생들을 모집하여 편성한 부대로 이명흠 대위는 대구에서 선발한 200여 명과 밀양에서 모집된 586명을 합하여 최종적으로 772명으로 독립 제1유격대대를 편성하였다. 

 

1950년 8월 18일 팔공산에서 북한 인민군이 쏜 박격포 포탄이 대구시내에 떨어졌다. 대구마저 합락될 상황이 되자 모든 학교는 휴업령이 내려지고 학생들은 나라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유격대에 자원 입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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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지키기 위해 나라를 구하기 위한 신념으로 학생들은 16, 17살의 어린나이에 계급도 군번도 없이 스스로 전쟁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부대장 이명흠의 이름을 따서 “명부대”라는 통상 명칭으로 대원들은 중고생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기초적인 구보와 제식훈련을 시작하였고 북한군으로부터 노획한 장비를 이용하여 2주간 훈련을 받고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되었다.

 

출발 전 이들에게 보급된 것은 인민군 군복, 3일치 식량, 탄약 50여발이며 부여받은 군번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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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14일

마침 케지아(Kejia) 태풍이 내습하는 시기에 파도는 높아 3~4m까지 오르내리고 그 위에 깊은 안개까지 심하게 덮였으므로 해안에 착안하기 매우 어려웠다. 풍랑이 거칠었고 설상가상으로 닻마저 끊어져 배는 좌초되고 심한 파도에 밀리게 되어 마침내 2,700톤급 문산호는 목적지 해상 4km 떨어진 곳에 좌초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명부대원들은 로프를 이용하여 적의 맹렬한 사격을 무릅쓰면서 상륙작전을 감행하였는데 어려운 조건 하에서 결행된 이 상륙전은 초기부터 북한군 1개 대대의 병력이 상륙부대를 향하여 집중사격을 퍼부어 아군은 전사자와 부상자가 속출하고 상륙할 때에 휴대하였던 탄약대부분을 바다 속에 유실 대원들의 사기는 매우 저하되고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다. 

 

09:00경

전 인원이 상육을 완료하였지만 또 한번의 위기 찾아왔다. 해안에 도착한 부대는 접근전을 펼쳤지만 화력차이가 났다. 상륙에 성공한 772부대는 상륙지대에서 가까운 고지를 탈환 오후 2시 50분경 이때부터 교두부 확보를 위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1950년 09월 15일 정오 

상륙부대는 34시간 만에 고지 점령 교두부 확보 

그러나 고지를 지키는 것은 또다른 문제였다. 

 

1950년 9월 16일 

9월 16일부터는 후방을 차단당한 조선인민군 제5사단의 정예부대인 2개 연대 규모의 부대가 T-34/85 전차 4대를 앞세우고 북상하여 후퇴한지 2틀 북한 지위부대 반격 772부대 전멸위기 

 

후퇴 명령 “상륙 5흘만에 후퇴” 772부대는 9월 19일까지 치열한 전투

 

1950년 9월 19일 새벽 “철수 작업은 상륙 작전만큼 어려웠다.”

06:00에 조난 장소에 도착한 조치원호는 좌초된 문산호 근처에 배를 대지 않고 문산호 동북쪽 약 400m이고 육지로부터는 약 300m 떨어진 지점에 닻을 내린 다음 구조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적이 아군이 다시 상륙하는 줄 알고 더욱 맹렬한 사격을 가하여 왔다. 그러나 구조작업을 엄호하는 함포사격과 비행기의 폭격으로 적의 화력은 견제되었다. 그 간격을 이용하여 13:33까지 약 7시간에 걸친 결사적인 구조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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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20일 새벽 

129명의 전사자를 내고 110명의 부상자를 포함한 677명을 탈출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적의 항전으로 승선 중 많은 사람이 죽고 2개소대 병력 30여명은 배를 못타고 잔류하여 그들 대부분은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다. 

 

원래 3일간의 작전예정이 잡혀 있었으나 문산호가 좌초된 관계로 철수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비록 장사 기습상륙작전은 희생이 많았으나 적을 기만하여 인천상륙을 성공시키는데 큰 효과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9월 14일의 실시된 장사 상륙전에서 사살한 적은 대략 적군 270명 사상에 포로 4명을 잡았으며, 방어시설인 토치카 11개소를 파괴하고 주 목적인 교통로 차단을 위해 교량 2개소와 도로 6개소를 파괴했다.

 

이 작전은 인천상륙작전의 앞서 소규모의 위장된 일개 상륙작전이었지만 이로 인하여 북한군 무정 군단의 동해안 전선은 예기치 않았던 큰 타격을 받았으며 당시 평양방송은 아군 2개연대가 동해안에 상륙하였다고 보도하였을 정도로 그들의 주의를 분산시키는데 성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군 제 1군단의 총 반격전과 인천상륙작전을 유리하게 수행할 수 있는 견제적인 조공의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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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공적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밀에 부쳐져 잊혀졌다가, 1997년에 인근을 순찰하던 해병대에 의해 작전에 쓰인 문산호와 전사자들의 유해 등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현재 발굴된 유해들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한국 전쟁의 판도를 뒤집은 주역들은 학도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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