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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시 게송을 지어 주었다.
회암(檜岩)의 판수(板首)가 운문(雲門)을 꾸짖고 백만의 인천(人天)을 한 입에 삼켰네
다시 밝은 스승을 찾아 참구한 뒤에 집에 돌아가 하는 설법은 성난 우레가 달리듯 하리.
나옹스님은 절하고 하직한 뒤에 명주(明州)의 보타락가산(補陀洛迦山)으로 가서 관음을 친히 뵈옵고, 육왕사(育王寺)로 돌아와서는 석가상(釋迦像)에 예배하였다. 그 절의 장로 오광(悟光)스님은 다음 게송을 지어 나옹스님을 칭찬하였다.
분명히 눈썹 사이에 칼을 들고 떼를 따라 죽이고 살리고 모두 자유로워
마치 소양(昭陽)에서 신령스런 나무 보고 즐겨 큰 법을 상류(常流)에 붙이는 것 같구나.
나옹스님은 또 설창(雪窓)스님을 찾아보고 명주에 가서 무상(無相)스님을 찾아보았다.
또 고목영(枯木榮)스님을 찾아가서는 한참 동안 말없이 앉았는데 고목스님이 물었다.
“수좌는 좌선할 때 어떻게 마음을 쓰는가?"
“쓸 마음이 없소.”
“쓸 마음이 없다면 평소에 무엇이 그대를 데리고 왔다 갔다 하는가?”
스님이 눈을 치켜뜨고 바라보니 고목스님이 말하였다.
"그것은 부모가 낳아준 그 눈이다. 부모가 낳아주기 전에는 무엇으로 보는가?"
나옹스님은 '악!' 하고 할(喝)을 한 번 하고는, “어떤 것을 낳아준 뒤다 낳아주기 전이 다 하는가?” 하니 고목스님은 곧 스님의 손을 잡고, “고려가 바다 건너 있다고 누가 말했던가 하였다. 나옹스님은 소매를 떨치고 나와 버렸다.
임진년(1352) 4월 2일에 무주(霧州) 복룡산(伏龍山)에 이르러 천암 원장스님을 찾았다. 마침 그 날은 천여 명의 스님네를 모아 입실할 사람을 시험해 뽑는 날이었다.
나옹스님은 다음의 게송을 지어 올렸다.
울리고 울려 우레소리 떨치니 뭇 귀머거리 모두 귀가 열리네.
어찌 영산(靈山)의 법회뿐이었겠는가 구담(瞿曇)은 가지도 오지도 않네.
그리고 절차에 따라 입실하였다.
천암스님은 물었다.
"스님은 어디서 오는가?"
“정자선사에서 옵니다.”
“부모가 낳아주기 전에는 어디서 왔는가?"
"오늘은 4월 2일입니다.”
천암스님은 “눈 밝은 사람은 속이기 어렵구나”하고 곧 입실을 허락하였다.
나옹스님은 거기 머물게 되어 여름을 지내고 안거가 끝나자 하직을 고했다.
천암스님은 손수 글을 적어 주며 전송하였다.
“석가 늙은이가 일대장교를 말했지만 그것은 모두 쓸데없는 말이다. 마지막에 가섭이 미소했을 때 백만 인천이 모두 어쩔 줄을 몰랐고, 달마가 벽을 향해 앉았을 때 이조는 눈 속에 서 있었다. 육조는 방아를 찧었고, 남악(南嶽)은 기왓장을 갈았으며, 마조(馬祖)의 할(喝) 한 번에 백장(百丈)은 귀가 멀었고, 그 말을 듣고 황벽(黃葉)은 혀를 내둘렀었다. 그러나 일찍이 장로 수좌를 만들지는 못하였다.
진실로 이것은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형상으로 그릴 수도 없으며, 칭찬할 수도 없고 비방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다만 저 허공처럼 텅 비어 부처나 조사도 볼 수 없고 범부나 성인도 볼 수 없으며, 남과 죽음도 볼 수 없고 너나 나도 볼 수 없다. 그 범위에 이르게 되어도 그 지경이라는 테두리도 없고, 또 허공의 모양도 없으며 갖가지 이름도 없다. 그러므로 형상도 이름도 떠났기에 사람이 받을 수 없나니, 취모검(吹毛劍)을 다 썼으면 빨리 갈아두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취모검은 쓰고 싶으면 곧 쓸 수 있는데 다시 갈아 두어서 무엇 하겠는가. 만일 그대가 그것을 쓸 수 있으면 노승의 목숨이 그대 손에 있을 것이요, 그대가 그것을 쓸 수 없으면 그대 목숨이 내 손 안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할을 한 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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