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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세 고승들의 승탑을 모신 청계사 아래 부도전
▲ 청계사 만세루
▲ 대웅전 옆에서 본 만세루
▲ 대웅전에 오르는 기단에 조각된 팔상도 가운데 초전법륜상
▲ 청계사 주 전각들
▲ 청계사 범종(조선 후기 작)
▲ 범종의 종걸이(용머리 장식)
▲ 대웅전과 범종각
▲ 영산전의 아난존자, 석가모니불, 아가섭자 (왼쪽부터)
▲ 청계사 야외 와불(석가모니 열반상)
▲ 청계사 삼성각
▲ 삼성각 내 산신탱화
▲ 청계사 탐방객들이 남긴 다양한 불상들과 스님조각상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서울의 인접도시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청계사는 수도권 동산객들이 많이 찾는 절이다. 청계사는 처음 창건시기를 신라말기로 기록하고 있지만 당시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이후 청계사의 본격적인 기록은 고려 후기 원나라 간섭기인 충렬왕 10년(1284)부터다. 이때 조인규(1227~1308)는 막대한 사재를 들여 조씨의 원찰로 청계사의 중창에 심혈을 기울였다.
조인규는 본래 이 지역의 변변치 못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원나라 간섭기 몽골어를 잘 배워 43세 충렬왕이 세자시절 세자를 모시고 통역관으로 원나라에 다녀오면서부터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원나라 황제의 딸(제국대장공주)이 충렬왕의 왕비가 됨에 따라 조인규는 왕비인 제국대장공주를 잘 섬겨 공주세력을 바탕으로 상징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원나라 세조(쿠빌라이칸)로 부터 신임을 얻어 원나라의 관직을 제수받기도 하엿다.
그 뒤 1292년 자신의 딸이 세자비로 간택되면서 조정의 유력한 존재가 되었고, 1298년 사위인 충선왕이 즉위하자 왕실의 측근이 되어 더욱 세력이 커졌다. 그러나 충선왕은 원나라 황제의 딸인 계국대장공주를 왕비로 삼은 상태로, 계국대장공주와 조인규의 딸 조비와의 불화로 원나라 황제의 신임을 잃은 충선왕마저 왕위에서 쫓겨나고 충렬왕이 복위하면서 충선왕의 장인인 조인규도 원나라로 끌려가 안서지역에 6년동안 유배되기도 하였다. 유배에서 풀려난 조인규는 원나라 황제의 명으로 판도참의사사에 임명되어 다시 관직에 복귀하였다.
말년에 조인규는 권세를 바탕으로 많은 재력을 갖추고 그의 아들들은 모두 재상의 지위에 올라 세도가가 되었으며, 조씨 가문의 후원으로 청계사는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고려시대 건립되었던 건축물은 보이지 않고, 다만 고려시대 석물로 조씨문중이 시주한 공덕비만이 남아있다.
근세 청계사는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로 추앙받는 경허선사의 출가지로 큰 족적을 남기고 있다. 이후 경허선사의 선맥을 이은 만공, 금오, 월산선사가 수행하였던 자취가 곳곳에 남아있다. 한국불교의 선맥은 신라말 구선선문으로부터 출발하여 고려시대에 매우 융성하였으나, 유교를 국시로 삼은 조선조에 이르러 차츰 기울다가 조선 중기 이후로는 거의 끊어진 상태였다가 조선 말기에 이르러 경허선사에 의하여 다시 되살릴 수 있었는데, 이곳 청계사는 한국선의 중흥조인 경허선사의 출가사찰인 점이 불교사적으로는 가장 큰 의미일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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