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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고성 연화산 옥천사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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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6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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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사 일주문
▲ 옥천사 일주문

 

옥천사 사천왕문, 옥천사로 오르는 계곡앞에 있다.
▲ 옥천사 사천왕문, 옥천사로 오르는 계곡앞에 있다.

 

사천왕 동 지국천왕, 남 증장천왕
▲ 사천왕 동 지국천왕, 남 증장천왕

 

사천왕문 옆으로 흐르는 옥천사 계곡
▲ 사천왕문 옆으로 흐르는 옥천사 계곡

 

옥천사 내에 있는 '증 호조참판 안공 비', 옥천사에 큰 공을 세운 분인 듯
▲ 옥천사 내에 있는 '증 호조참판 안공 비', 옥천사에 큰 공을 세운 분인 듯

 

낙엽이 소복하게 쌓인 옥천사
▲ 낙엽이 소복하게 쌓인 옥천사

 

옥천사 대웅전 앞 자방루, 누각 앞의 넓은 마당이 있는데 넓은 마당은 임진왜란 당시에 승군들의 훈련장이었다고 한다.
▲ 옥천사 대웅전 앞 자방루, 누각 앞의 넓은 마당이 있는데 넓은 마당은 임진왜란 당시에 승군들의 훈련장이었다고 한다.

 

옥천사에 있는 근세 한국불교를 지켜온 청담스님 사리탑. 청담스님 사리탑은 서울 도봉산 도선사에도 있다. 옥천사에 청담스님 사리탑이 모셔진 것은 이곳에서 출가하였기 때문이다. 스님으로 태어난 곳에 스님의 사리를 모셨다.
▲ 옥천사에 있는 근세 한국불교를 지켜온 청담스님 사리탑. 청담스님 사리탑은 서울 도봉산 도선사에도 있다. 옥천사에 청담스님 사리탑이 모셔진 것은 이곳에서 출가하였기 때문이다. 스님으로 태어난 곳에 스님의 사리를 모셨다.

 

옥천사 자방루 내부모습, 사찰의 주요 전각 앞에는 보통 경사지를 이용하여 누각이 있지만, 자방루는 사찰의 대웅전에 견줘 매우 큰 편이었다.
▲ 옥천사 자방루 내부모습, 사찰의 주요 전각 앞에는 보통 경사지를 이용하여 누각이 있지만, 자방루는 사찰의 대웅전에 견줘 매우 큰 편이었다.

 

옥천사 자방루, 임진왜란 당시 승군들이 훈련하던 때는 훈련장으로 쓰였다.
▲ 옥천사 자방루, 임진왜란 당시 승군들이 훈련하던 때는 훈련장으로 쓰였다.

 

옥천사 대웅전, 옥천사는 북서향으로 아침햇살이 지붕에 비친다.
▲ 옥천사 대웅전, 옥천사는 북서향으로 아침햇살이 지붕에 비친다.

 

대웅전 내부모습, 조선 후기 불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 대웅전 내부모습, 조선 후기 불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대웅전 내 삼존불
▲ 대웅전 내 삼존불

 

옥천사 산신각, 아주 작은 전각이라, 사람이 들어가기도 비좁다,
▲ 옥천사 산신각, 아주 작은 전각이라, 사람이 들어가기도 비좁다,

 

산신각의 산신과 호랑이, 연화산 호랑이 모습이 정답게 느껴진다.
▲ 산신각의 산신과 호랑이, 연화산 호랑이 모습이 정답게 느껴진다.

 

옥천사 독성각의 독성(獨聖), 독성이란 혼자 수련하여 우주 자연의 이치를 깨달은 성인이라는 뜻으로, 부처님을 모르고도 깨달았다는 분이다. 깨닫고 보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고 함.
▲ 옥천사 독성각의 독성(獨聖), 독성이란 혼자 수련하여 우주 자연의 이치를 깨달은 성인이라는 뜻으로, 부처님을 모르고도 깨달았다는 분이다. 깨닫고 보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고 함.

 

산신각과 독성각 앞에서 예를 표하는 탐방객. 부처님과 관계없지만 깨달은 존재에 대한 예의는 중요한 것, 이는 한국에만 있는 포용성이기도 하다. 언젠가 서양종교의 성인도 사찰의 전각에 모셔질지 알 수 없는 일.
▲ 산신각과 독성각 앞에서 예를 표하는 탐방객. 부처님과 관계없지만 깨달은 존재에 대한 예의는 중요한 것, 이는 한국에만 있는 포용성이기도 하다. 언젠가 서양종교의 성인도 사찰의 전각에 모셔질지 알 수 없는 일.

 

옥천사 창건주 의상대사상
▲ 옥천사 창건주 의상대사상

 

옥천사에서 출가한 청담스님,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불교를 이끌어 오늘에 이르게 하였다.
▲ 옥천사에서 출가한 청담스님,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불교를 이끌어 오늘에 이르게 하였다.

 

옥천사 전각들, 가운데는 요사채 보구공사를 위하여 거물이 해체되었다.
▲ 옥천사 전각들, 가운데는 요사채 보구공사를 위하여 거물이 해체되었다.

 

아궁이에 땐 불이 굴뚝으로 나오고 있는 옥천사 요사채
▲ 아궁이에 땐 불이 굴뚝으로 나오고 있는 옥천사 요사채

 

옥천각(玉泉閣): 옥천사 감로수가 솟아오르는 곳에 집을 지어서 보호하고 있다.
▲ 옥천각(玉泉閣): 옥천사 감로수가 솟아오르는 곳에 집을 지어서 보호하고 있다.

 

감로수가 솟아오르는 곳
▲ 감로수가 솟아오르는 곳

 

바위 속에서 솟아오르는 옥천사 석간수가 넘쳐 흘러 표주박 같은 곳을 거쳐서 내려가고 있다. 옥천사의 감로수로 차를 내려 마시면 정말 감로차가 될 듯하다.
▲ 바위 속에서 솟아오르는 옥천사 석간수가 넘쳐 흘러 표주박 같은 곳을 거쳐서 내려가고 있다. 옥천사의 감로수로 차를 내려 마시면 정말 감로차가 될 듯하다.

 

깊어가는 가을에 피어난 차꽃, 이 차꽃은 내년 봄이 되면 열매가 맺는다.
▲ 깊어가는 가을에 피어난 차꽃, 이 차꽃은 내년 봄이 되면 열매가 맺는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올해도 저물어가는 11월 중순이 되었다. 가을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11월, 멀리 남해 다도해가 가까운 고성의 고찰을 찾았다. 경남 고성은 태고적 공룡들이 살았던 흔적들이 많아, 공룡의 터전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공룡이 살던 때는 너무도 먼 옛날이다.

 

 세월은 쉬임없이 흘러서 지구상의 생명체들이 진화를 거듭하여 인간이 생겨나고, 이 땅에 인류문화의 꽃이 피어났다. 그 중에도 옥천사에 불교의 싹이 돋아난 것은 1,400여년 전 의상대사때 부터이다. 의상대사가 살았던 시대는 한국땅이 5국의 각축시대가 마무리되어 가던 때였다. 그 때의 5국은 고구려, 백제, 신라로 알려진 3국과 북쪽에 부여, 그리고 남쪽에는 가야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통 3국시대라고 하지만, 부여와 가야를 뺀다는 것은 조상에 대한 모독이고 역사의 무지이다.

 

그런 5국각축의 시대를 마무리한 것은 신라이고, 그것은 행 불행을 떠나서, 역사의 사실이다. 크게 5국시대가 마무리되어 한민족은 단군을 민족의 조상으로 모시고 이후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전쟁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한나라 사람이 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일이 아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신라의 지배층은 큰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고민 끝에 이를 풀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의  가르침 중 화엄사상에 의지한 화엄불국토를 만드는 것이었다.  전쟁은 끝났으나 나라가 망해 패배의식에 살던지역 백성들의 마음을 불국토 사상으로 어루만져 하나로 융화시키는 것이다.

 

의상은 신라에서 출가하여 당시 대승불교가 크게 발전하고 있는 당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고승인 지엄의 문하에 들어가 화엄학을 정립하였고, 당나라 고승 법장과 함께  화엄학의 수제자가 되었다. 의상은 지엄의 법을 전수받아 당나라에 남아 제자들을 지도해 줄 것을 제안 받았으나, 자신의 조국 신라로 돌아와, 화엄학을 펼쳐 패배와 원한으로 사무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화엄종 사찰들을 세워 나갔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곳 고성 옥천사인 것이다. 그는 신라지역보다도 오히려 백제 고구려지역을 찾아다니며 절을 세웠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에게 마음의 의지처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이곳 고성은 옛 가야지역이었고, 본래는 신라보다는 오히려 백제와 깊은 관계가 있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이후 옥천사는 고려시대 혜거국사, 혜은대사, 묘응대사, 보응대사, 지운대사 등 고승들이 이끌며 고찰로써 면모를 유지하였으나 조선시대에 들어 숭유억불정책으로 현상유지하기도 바쁘게 살아왔다. 그러다 조선 중기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지역의 스님들은 의승군을 조직하여 왜군과 전쟁을 치렀는데, 이때 옥천사는  수백명  승군들의 훈련장이 되었다. 지금도 넓은  자방루 앞 마당은 당시를 짐작케 한다. 왜군은 임진난 이후 다시 침략했던 정유년 승군들의 본거지였던 옥천사의 전각들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그렇게 불타버린 옥천사는 40여년 동안 잡초만 무성한 채 내려오다 인조 17년 학영대사가 근처를 지나다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는데, 그 때 꿈속에 신인이 나타나 웅장한 절터를 보여주었다. 학영스님은 지난날 꿈이 너무도 기이하여 주변을 살피던 중 이곳에 올라와보고 꿈속의 절모습이 바로 이곳임을 알게되었다. 학영대사는 도반인 의오대사와 함께 근처에 초가집을 짓고 이곳에 옥천사를 중창하였다.

 

옥천사는 조선 후기에는 주변에 많은 전답을 거느린 부자절로 농민들로부터 소작료를 받았다. 매년 소작으로 받은 쌀이 1,000석이나 되었다고 한다. 절에 논밭이 많아진 까닭은 당시에는 농민들이 산판을 논으로 개간한 후 3년 동안 자영한 뒤 절에 돌리면 세금을 면제받아 사찰답으로 귀속하기도 하였고, 스님들은 귀속토지에서 받은 소작료를 모아 계속 전답을 늘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절이 부자가 되자 많은 스님들이 몰려들어 스님이 300명이 넘을 정도로 많았다. 이러한 경우는 조선시대 절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지나, 1950년 농지개혁으로 사찰의 전답은 모두 소작농민들에게 넘어가 하루아침에 전답 한 평 없는 가난한 절이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대웅전, 자방루 등 전각과 그 전각에 모셔진 부처님 탱화 등 뿐이었다. 그렇게 옥천사는 오늘에 이르렀다.

 

옥천사의 고승으로는 창건주 의상대사가 있으며, 최근에는 일제강점기 당대 학승으로 유명한 박한영스님으로부터 출가한 청담스님이 있다. 청담스님은 이곳에서 삭발 출가하여 일본불교가 판치는  한국불교를 본래 한국불교의 전통을 되찾고자 정화운동을 이끌었다. 그가 주로 활동했던 곳은 서울 도봉산 도선사였으나, 그의 출가지가 이곳 옥천사였기에 그의 사리는 서울 도봉산 도선사와 이곳 옥천사에 나누어 봉안하였다.

 

연화산 깊은 골짜기에 자리한 고성 옥천사의 역사를 살피며 옥천사의 가을 모습을 돌아보았다. 가을이 깊어지면 산과 들의 나무들은 모두가 그 잎을 떨구는데, 옥천사의 뒷편에는 차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생물은 그 생태가 같지가 않아서, 다른 나무들의 잎이 시들고 있지만, 차나무는 새생명을 이어갈 씨앗을 위하여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 꽃은 겨울을 지나 봄이 되면 다음 세대를 위한 열매로 익어갈 것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담스러운 차꽃에는 벌들이 부지런히 꿀을 담아 나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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