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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 백제의 미소 서산마애삼존불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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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2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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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2월 어느날




마애삼존불을 가는 길
▲ 마애삼존불을 가는 길

 

마애삼존불을 탐방하고 내려오는 사람들
▲ 마애삼존불을 탐방하고 내려오는 사람들

 

관리사로 오르는 계단
▲ 관리사로 오르는 계단

 

마애삼존불 관리사
▲ 마애삼존불 관리사

 

마애삼존불 출입계단
▲ 마애삼존불 출입계단

 

마애삼존불 앞 높은 석축
▲ 마애삼존불 앞 높은 석축

 

마애삼존불 앞에서 기도 드리는 스님-1
▲ 마애삼존불 앞에서 기도 드리는 스님-1

 

기도하는 스님-2
▲ 기도하는 스님-2

 

기도하는 스님-3
▲ 기도하는 스님-3

 

서산 마애삼존불, 가운데 주존불, 앞에서 볼 때 왼쪽에는 제화갈라보살, 오른쪽에는 미륵보살
▲ 서산 마애삼존불, 가운데 주존불, 앞에서 볼 때 왼쪽에는 제화갈라보살, 오른쪽에는 미륵보살

 

백제의 미소로 잘 알려진 주존불은 석가모니불로 생각하고 있는데, 머리 주변에 연'꽃문양의 광배가 새겨져 있으며, 얼굴은 백제인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고 평가되는 불상이다. 아침 햇살이 은은하게 비쳐들어 그 미소가 잘 드러나고 있다.
▲ 백제의 미소로 잘 알려진 주존불은 석가모니불로 생각하고 있는데, 머리 주변에 연'꽃문양의 광배가 새겨져 있으며, 얼굴은 백제인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고 평가되는 불상이다. 아침 햇살이 은은하게 비쳐들어 그 미소가 잘 드러나고 있다.

 

주존불의 오른쪽에 있는 제화갈라보살. 제화갈라보살은 석가모니의 전생에 보살로 살았던 때의 이름이다.
▲ 주존불의 오른쪽에 있는 제화갈라보살. 제화갈라보살은 석가모니의 전생에 보살로 살았던 때의 이름이다.

 

주존불의 왼쪽에 있는 미륵보살, 미륵보살은 후세에 이세상에 부처로 올 보살로, 현재는 도솔천에서 중생을 제도하고 있다는 보살이다. 해맑은 모습의 얼굴에 손상이 안되어서 더욱 좋았다. 다만 어깨와 팔부분의 손상은 아쉬웠다.
▲ 주존불의 왼쪽에 있는 미륵보살, 미륵보살은 후세에 이세상에 부처로 올 보살로, 현재는 도솔천에서 중생을 제도하고 있다는 보살이다. 해맑은 모습의 얼굴에 손상이 안되어서 더욱 좋았다. 다만 어깨와 팔부분의 손상은 아쉬웠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서산 마애삼존불은 백제시대 언젠가 조성된 불상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전해지고 있는 백제불상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마애불상으로 넉넉한 백제인의 마음씨를 잘 표현한 작품으로도 알려져 있다. 서산마애삼존불은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상왕산계곡 가파른 절벽에 새겨진 불상으로 운산면에 있다고 하여 '운산마애석불'이라고도 한다. 본래 백제시대 부르던 이름은 알 수 없고, 서산군에 있다고 하여 서산마애삼존불로 불리워지고 있다. 현재는 공식명칭이 '용현리마애삼존불'로 국보 제84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이곳은 당시 백제의 서울이었던 부여, 공주, 익산에서 서해 뱃길 포구인 태안이나 당진으로 가는 길목으로 가야산을 넘어오는 지름길이다. 가야산 근처에는 많은 큰 절들이 있었는데, 조선 후기 까지도 가야산 건너편에 가야사라는 큰 절이 있었고, 상왕산 서산마애삼존불 근처에는 보원사라는 큰절도 있었다. 또 서산마애삼존불이 있는 상왕산 건너에는 서산 상왕산 개심사도 있다.

 

그러나 이 절들은 흥선대원군이 유명 풍수지관의 말에 따라 자기 자손에서  2대 천자를 배출하기 위하여 빼앗기로 마음먹은 뒤, 가야사의 수많은 전각들을 완전히 불태워 폐사하고, 그곳에서 수도하던 스님들을 다 내쫓았다. 전각들이 없어지고 텅빈 가야사의 중심위치에인 대웅전 자리에는 흥선대원군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썼다. 이후 그의 아들과 손자가 대한제국의 황제가 되었다고 하니, 그 명당의 덕을 본 것인지 알듯 모를듯 하다.

 

그렇게 가야사가 없어지고 그자리가 남연군의 묘가 되었지만 조선말 유교를 국시로한 조선이 서양사람들을 인간의 도리를 모르는 오랑캐라 하여 무시하고, 오랑캐 문명을 받아들이지 않기위하여 개항을 거부하자 프랑스는 무력으로 조선을 개항하고자 최신무기와 대포로 무장한 군대를 파견하였다.

 

그 과정에 조선사람들이 조상의 묘를 신성시한다는 것을 알고,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묘를 파묘훼손하고 부장품을 도굴하는 등 흥선대원군의 조선왕조를 격분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런 역사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남연군의 묘는 다시 살아남았으나, 남연군묘 이전에 있었던 원주인 가야사의 흔적은 알수도 없게 되었다. 남연군묘에 절이 있었던 흔적은 주변에 흩어진 돌들과 깨진 기왓장들로 겨우 알 수 있을 뿐이다.

 

또 서산마애삼존불의 바로 옆 1km 거리에는 보원사터가 있는데, 이 절 또한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큰절로, 고려초 법인국사가 주석하여 큰 절이 되었던 곳이나, 조선시대 불교탄압으로 조선조에 폐사가 되고 말았다. 이곳이 절이었음은 보원사를 크게 중창했던 법인국사 탄문스님의 승탑과 그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 보원사지오층석탑 그리고 절의 입구에 세워졌던 절의 품격을 말해주던 당간지주가 남아 그 역사를 증거하고 있다.

 

서산마애삼존불은 보원사가 유지되던 때 까지는 아마도 보원사의 암자로 많은 스님과 신도들이 잘 관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절들이 폐사되고 그와 함께 서산마애삼존불도 잊혔다가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는데 그 때는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잊혀진 서산마애삼존불은 1959년 '홍사준'이라는 역사학자가 새롭게 발견하였다. 그는 불교가 융성했던 백제지역 옛 유적들을 찾아 이곳 저곳 다녔는데, 이곳 용현리에 이르러 마을의 한 노인에게  " 혹시 근처에  옛날 부처님을 본 적이 있는지요?"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노인은 용현리 "앞 개울 넘어 계곡의 바위 벽에 환하게 웃고 있는 산신령이 있는데, 좌우에 마누라 두사람을 거느리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그말을 듣고 그곳을 찾아 산비탈을 헤치고 올라가서 다시 발견한 것이 오늘 서산마애삼존불이다.

 

어렴풋이 그런 사연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내력보다는 백제의 미소로 이름난 돌부처를 사진으로 담고자 나는 이른 새벽 동쪽에서 비치는 햇살에 빛나는 백제인의 환한 모습을 기대하며 마애삼존불을 찾아서 잘 다듬어놓은 탐방로 산길을 올랐다. 그런데 오늘따라 새벽에 내린 마른 눈이 돌계단 위에 하얗게 쌓여 매우 미끄러웠다.

 

돌계단을 조심조심 올라 마애삼존불로 가는 마지막 출입문 앞에는 생각하지도 못한 자물쇠가 잠겨있었다. 예전에는 자물쇠가 없었는데 이제는 개방시간을 정하여 관리하고 있었다. 대문앞에 이르러 시간을 보니 이제 7시였다.  주변을 살펴보니 안내판이 있고, 개방시간을 보니 출입문은 9시에 열린다고 되어있었다. 두시간을 그자리에서 기다릴 수 없어서 먼저 근처에 있는 보원사터를 보고 오기로 하였다.

 

그렇게 1시긴 30분동안 보원사터를 돌아보며 법인국사의 승탑과 탑비, 보원사터 오층석탑을 촬영하고, 다시 9시 쯤에 계단을 오르니 마애불 근처에서 어디선가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계단을 오르면서 생각으로는 관리사에서 예불을 드리는가 싶었으나, 관리사에 이르고 보니, 목탁소리는 마애삼존불 방향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새벽에 추운 바깥에서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누구인지 매우 궁금하였다. 그렇게 궁금증을 가지고 마애삼존불 앞에 이르니, 그곳에는 한 스님이 바닥에 얇은 스폰지 매트만 깔고 앉아서 목탁을 치면서 불경을 독송하며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여려차례 서산마애삼존불을 왔었지만, 스님이 이렇게 기도드리는 모습은 오늘 처음보았다. 부처님 앞에서 목탁치고 예불드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모습을 보니 여러 생각이 머리에 스쳐지나갔다.

 

서산마애삼존불을 제대로 보려면 겨울철 햇빛이 맑은날 이른 아침에 보아야 가장 잘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마애삼존불의 방향은 동향이지만, 앞쪽에 산이 가리고 있어서, 동남향의 비탈진 각도에서 해가 뜨는 겨울철이어야 햇살이 마애삼존불에 비쳐 불상의 모습이 가장 잘 들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절이 봄이 되면 햇살의 각도도 바뀌어 아침 햇살을 바로 받지 못하고, 또 앞산에는 나무잎들에 자라나 햇살을 가리며, 시간이 지나 마애불에 햇살이 비칠만큼 솟아오르면 이제는 마애불의 위에 있는 튀어나온 바위 그림자가 미륵보살을 가려서 미륵보살의 얼굴을 어둡게 하기 때문에 제대로된 마애삼존불을 볼 수 없다.

 

오늘은 오랫만에 내린 눈이 주변을 더욱 깨끗하게 해 주었고, 또 스님의 청정한 목탁소리와 기도소리를 함께 들을 수 있어서, 그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서산마애삼존불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는 정말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서산마애삼존불을 사진으로 담고 돌아서는 순간,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생각하게 되었다.

 

서산마애삼존불이 1,400여년 전 깊은 산속 절벽에 새겨지고, 해맑은 모습으로 자리한 후, 적어도 1,000여년을 그대로 있으면서, 수많은 스님들과 신도들이 정성어린 기도를 드렸을 것이나, 언제인지 모르지만 조선조 어느 날 보원사의 어떤 스님이 마애삼존불 앞에서 마지막으로 기도를 드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지막 날 그 스님은 백제인의 마음으로 해맑게 웃고 있는 마애삼존불에 향을 피우고, 정안수를 떠 받치면서 오늘 스님처럼 간절한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이 마지막임을 스스로 알았을 스님은 그 마음이 얼마나 아팟을까 싶었다. 그날 기도를 마치고 내려가면 그 뒤로는 아무도 찾지 않을 저 부처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인생과 우주의 진리를 깨달아 그 뒤를 따르라고 설파한 석가모니부처님의 진리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의심하거나, 무심히 웃음을 머금은 부처님과 보살님에 실망감이나 허망함은 없었을까?

 

부처님의 진리가 그리도 위대하다는데, 이제 그 부처님 앞에 향 하나 피워줄 사람도 없고, 정성어린 물 한잔 올릴 사람이 없이 되었는데도, 저렇게 천진스러운 모습으로 그져 웃기만 하고 있으니, 그런 현실 속에서 과연 부처님의 위대함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제 오탁악세 말세에 말법시대가 되어 불법도 완전히 사라지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지막 기도를 드리고 산을 내려오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내 머리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렇게 산속에 완전히 잊혀진 서산마애삼존불은 수 백 년 동안을 모르고 산속에 바위에 있는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이야 처음 바위에 새길때 모습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리고 수 백 년 만에 다시 문화재를 연구하는 학자에 의해서 새롭게 발견되고, 여러 평가를 거쳐서 오늘 우리 앞에서 백제인의 미소를 보여주고 있는 서산마애삼존불이다.

 

나는 오늘 가장 아름다운 서산마애삼존불을 보고 삼배를 올리면서, 생각에 잠겨보았다. 오늘날 그나마 불교가 다시 살아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찾고 있지만, 영겁의 세월로 본다면 그 불교의 가르침이 또 다시 사람들의 마음에서 멀어질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백제의 미소를 보여주는 서산마애삼존불은 또 다시 잊혀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울러 잊혀질 뿐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파괴되어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의 많은 불교문화재는 외국과의 전쟁에만 파괴되고 훼손되었던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불교를 싫어하는 우리 조상들이 전국의 고귀한 많은 석불들을 훼손하여왔던 것처럼 말이다.

 

오늘 본 아름다운 서산마애삼존불의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우리 후손들은 어떻게 지켜낼 것인지 깊은 염려도 해보았다. 지금은 다종교시대로 그나마 문화유산으로 유지하는데 큰 염려가 없지만, 미래에 어느 때에는 그 다종교시대가 끝나고, 다른 배타적 종교가 한국인의 정신을 지배하는 날에는 누구도 장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교의 전파과정을 돌아보면 옛날 대승불교의 발생과 발전에 큰 역할을 했던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이 부처님을 멀리하고, 이슬람화 되면서 이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이룩해 놓았던 수 많은 불교유적을 무자비하게 파괴해 버렸던 역사의 현실을 알기에... 그 뿐아니라, 오늘날 온나라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부처상 보살상들의 훼손된 모습은 조선시대 우리의 선조들이 행한 일들임을 알고부터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디 우리후손들의 무지함으로 인하여 다시는 그런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뿐이다.

 

수많은 형상으로 오래전에 만들어져 보물이 된 부처나 보살상은 단지 우리의 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부처를 깨닫기 위한 계기를 마련해주는 동기일 뿐, 금부처, 철부처, 흙부처, 바위에 새긴 부처상이 우리의 삶을 좌우하지는 않는 것, 다양한 재료와 크고 작은 모습으로 부처와 보살을 만들어 집을 지어 모시고 예불을 드리지만, 이 또한 우리 마음속 부처를 찾기 위한 방편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가운데 깨뜨려 일그러진 모습이라 하여 부처가 아님도 아니지만, 그런 훼손된 모습에서 인간의 무지와 편협됨을 새삼스럽게 알게된다.

 

형상으로 된 부처만을 부처로 보지 말고, 자신의 마음속에 씨앗처럼 간직한 부처의 새싹을 찾아보았으면 좋겠다. 화엄세상에서는 만물이 다 부처라하고, 선세상에서는 누구나 깨치면 부처라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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