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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 임진왜란 승군장 영규대사와 금산 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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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등록일
2022.01.14 09:56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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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석사 일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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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장 기허당 영규대사비를 보호하는 보호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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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호각내 비석, 영규대사의 공적을 기록한 유일한 비석이나, 일제강점기 훼손된 모습이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의 잘못을 뉘우치기 보다는 승장에 대한 반감과 치욕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며, 그런 생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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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석의 윗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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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스님들의 사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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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석사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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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석사의 역사를 지켜온 천년고목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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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되면 만물도 신으로 승격된다. 많은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신목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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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목 은행나무 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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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석사 입구에서 본 범종각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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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석사로 올라가는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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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계단과 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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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석사 대웅전과 조사전, 조사전은 서산대사, 사명당, 영규스님 등 임진왜란 당시 구국을 위해 앞장섰던 스님들의 초상이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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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병장 영규대사가 수도할 때 머물던 전각이다. 이곳은 영규대사외 아홉분 선사들의 위패를 모시던 곳이었으나 영규대사의 위패를 칠백의총 종용사 사당으로 이전하면서 현재는 스님들의 요사채로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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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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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과 조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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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사전의 기허당 영규대사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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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개가 자욱한 보석사 경내와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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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종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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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종각내 큰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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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족각내 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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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종각내 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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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등과 등운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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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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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신각의 한쪽면에는 보석사를 지켜온 은행나무가 신으로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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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석사 산신령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남 금산의 고찰인 보석사(寶石寺)는 신라 헌강왕때인 885년 조구스님이 창건하였다. 절의 이름이 보석사인 까닭은 당시 절 앞산에서 금이 많이 나와서 그 금으로 불상을 조성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후의 절 역사는 임진왜란 이후 모두 불타버려서 알 수가 없고, 폐사가 되었던 절터에 조선말 고종 때 명성황후가 전국의 명소를 찾아서 기도하던 중 이곳에도 시주하여 중창되었다.  당시 이곳은 행정구역상 충남이 아니라 전북으로 전북지역내 33개 사찰을 관할하는 큰절이기도 하였다.

 

보석사의 현재 모습은 대웅전과 전각들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나 무엇보다도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최초로 승군을 이끌고 전투에 나아가 승전 기록을 남긴 기허당 영규스님이 수도하였던 절로 유서 깊은 절이다. 정규군이었던 관군들이 연전연패하는 상황에서 영규스님이 이끄는 승군들의 쾌거는 역사적으로도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이곳 보석사에서 수도하던 영규스님은 임진왜란을 당하여 살생이 무자비하게 자행되고, 전국토가 유린되는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이에 영규스님은 깨달음과 중생구제의 자비심 실현은 절안에서 수도 참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악마들과 같은 일본군들을 타도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주변의 사찰에 통문을 돌려 승군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목탁대신 죽창과 활로 무장하고 침략군에 맞섰다.

 

영규스님이 이끌던 승군은 1592년 8월 1일 근처 청주탈환전투에서 승리하였고, 이후 보름만에 다시 금산지역에서 조헌이 이끌던 의병들과 합세하여 처절한 전투를 치루게 된다. 그러나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의 세력에 밀려 금산벌에서 800여 승군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게된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장렬한 최후를 맞은 승군과 의병들의 추모 부분이다. 당시

금산전투에서 조헌이 이끌던 700여명의 의병들은 후학들에 의해 시신이 수습되어 모두 하나의 무덤에 묻히게 되는데 오늘날의 칠백의총이다. 그러나 영규스님이 이끌던 800여명의 승군(스님)들의 시신은 금산벌판에 그대로 방치되어 무덤조차 없는 상태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단지 승군대장으로 활약한 영규스님만이 보석사 앞의 비석으로 기념될뿐 함께 산화한 800여 승군들에 대하여는 비석조차 없다.

 

보석사와 영규스님의 자취를 돌아보며 보석사의 옛 문화유적의 향기가 적은 것도 아쉬웠지만,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의 자취를 느낄 수 없는 현실 또한 아쉽고 야속하기 그지 없었다. 비록 500년이 넘는수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이제라도 숭고한 스님들의 업적과 뜻을 되살리는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 생각하며 보석사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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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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