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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설의 종조 도선국사가 자란 '월출산 도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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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1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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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설의 종조 도선국사가 자란 '월출산 도갑사' 
도갑사 일주문 앞 보호수 팽나무
▲ 도갑사 일주문 앞 보호수 팽나무

 

도갑사 일주문
▲ 도갑사 일주문

 

해탈문 계단과 소맷돌, 소맷돌에 삼태극문양이 선명하다
▲ 해탈문 계단과 소맷돌, 소맷돌에 삼태극문양이 선명하다

 

도갑사 해탈문
▲ 도갑사 해탈문

 

도갑사 해탈문 측면
▲ 도갑사 해탈문 측면

 

도갑사 해탈문 현판과 기둥 위 공포, 단청이 벗겨져 마치 없는 듯 보인다.
▲ 도갑사 해탈문 현판과 기둥 위 공포, 단청이 벗겨져 마치 없는 듯 보인다.

 

해탈문에서 본 보제루와 문간채
▲ 해탈문에서 본 보제루와 문간채

 

대웅보전 앞 마당에 오층석탑과 느티나무
▲ 대웅보전 앞 마당에 오층석탑과 느티나무

 

도갑사 대웅보전과 오층석탑
▲ 도갑사 대웅보전과 오층석탑

 

도갑사 오층석탑, 투박한 맛이 느껴진다.
▲ 도갑사 오층석탑, 투박한 맛이 느껴진다.

 

도갑사 대웅보전 현판
▲ 도갑사 대웅보전 현판

 

도갑사 대웅보전내 삼존불과 목각탱화
▲ 도갑사 대웅보전내 삼존불과 목각탱화

 

도갑사 대웅보전내 화려한 닫집, 닫집은 하늘에 지은 집으로 불국토를 뜻한다.
▲ 도갑사 대웅보전내 화려한 닫집, 닫집은 하늘에 지은 집으로 불국토를 뜻한다.

 

도갑사 천불전
▲ 도갑사 천불전

 

천불전내 삼존불과 뒤로는 천불이 있다.
▲ 천불전내 삼존불과 뒤로는 천불이 있다.

 

도갑사 삼성각
▲ 도갑사 삼성각

 

입체로 조성된 산신탱화
▲ 입체로 조성된 산신탱화

 

도선국사비로 가는 개울에 무지개다리
▲ 도선국사비로 가는 개울에 무지개다리

 

도선국사비각 전경
▲ 도선국사비각 전경

 

도선국사비각 정면
▲ 도선국사비각 정면

 

2마리의 용이 휘감고 있는 도선구사비 이수
▲ 2마리의 용이 휘감고 있는 도선구사비 이수

 

도선국사비
▲ 도선국사비

 

도갑사 부도전에서 본 도선국사비각
▲ 도갑사 부도전에서 본 도선국사비각

 

도갑사 석불, 미륵전에 모셔진 석불
▲ 도갑사 석불, 미륵전에 모셔진 석불

 

도갑사 명부전
▲ 도갑사 명부전

 

수미왕사 비각
▲ 수미왕사 비각

 

도갑사 수미왕사비
▲ 도갑사 수미왕사비

 

도갑사에서 자란 도선국사 진영
▲ 도갑사에서 자란 도선국사 진영

 

도갑사 수조(돌확), 크기가 무척 큰 돌확으로 많은 스님들이 물을 담아 쓰던 것이다.
▲ 도갑사 수조(돌확), 크기가 무척 큰 돌확으로 많은 스님들이 물을 담아 쓰던 것이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무더위가 전국을 덮고 있는 7월 중순 남도 땅 끝자락에 있는 아름다운 절 도갑사를 찾았다. 도갑사에는 백제시대에 창건한 문수사(文殊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나, 신라말 도선국사가 근처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자라났다고 하며, 바로 그 도선국사가 후에 도갑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도선의 탄생에 대하여는 여러 이야기가 전한다. 그 중에 한 이야기를 따르면 도선의 어머니는 최씨라고 하는데, 그의 아버지를 알 수가 없어서 어머니 성을 따서 최씨가 되었다. 도선의 어머니는 처녀시절 빨래를 머리에 이고 늘 다니던 우물에서 빨래를 하였는데, 하루는 우물속에 참외가 떠 있었다고 한다. 처녀는 참외를 먹고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으나, 집안에서는 이를 수치로 여겨 갓난아이를 숲속에 버리게 하였다.

 

그런데 갓난아기를 버린 어미는 아이의 생사를 잊을 수 없어 버린 곳에 다시 가보고 깜짝 놀랐다. 그곳에는 산비둘기들이 날아와 아기를 보호하고 먹이를 물어다 먹여서 기르고 있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이 아이가 보통아이가 아님을 직감하고 버렸던 아이를 거두어 이곳 문수사 주지스님께 자초지종을 말하고 맡겨 기르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도선국사의 탄생에 대하여는 이와는 다른 이야기도 전한다.

 

문수사에서 15세에 출가하여 자란 도선은 전국의 이름난 절을 돌아다니며 수행하였고, 이후 중국에 들어가 풍수지리학을 공부하여 풍수를 우리땅에 맞게 정리하고 각 지역별 특성과 명당터를 찾아 비기를 썼다고 한다. 도선은 예언력도 뛰어나 신라말 혼란기를 정리할 훌륭한 왕이 태어날 것을 예언하기도 했는데, 그가 바로 고려 태조 왕건이다. 때문에 왕건을 비롯한 고려의 왕들은 도선의 풍수지리적 도참사상을 깊이 따랐다. 도선은 고려 숙종에 이르러 대선사로 추증되고 왕사로 추존되었으며, 고려 인종은 선각국사로 추존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도선이 도입한 풍수지리설은 고려는 물론 조선시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풍수설은 개인의 집터와 무덤을 정하는데에서부터, 명산에 짓는 절터를 잡는 것을 넘어, 왕조의 도읍을 정하는데 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그 영향은 지금도 살아있다.

 

도갑사의 역사는 도선국사로 부터 시작하였다.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조에 들어서 세조2년(1456) 불경의 한글번역에 큰 공을 세운 신미와 수미대사 시절 크게 중창불사가 이루어졌다. 이 때 절의 규모는 966칸의 전각이 들어선 큰 절이었다고 하며, 주변에는 수많은 암자를 거느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임진, 정유난을 거치면서 절안의 전각들은 해탈문을 제외하고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도선은 도갑사의 후사에 대하여도 예언을 하였다고 한다. 그가 도갑사에 머물다 떠나면서 한 말에 따르면, "내가 떠난 뒤 철모쓴 자가 와서 절에 불을 지를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말대로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때 철모쓴 사람들이 절을 모두 불태웠던 것이다.

 

찬란했던 역사는 모두 쇠락해버렸지만를 그래도 도갑사에 남은 오래된 건물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절의 본전에 이르는 문인 해탈문이다. 도갑사의 해탈문은 정면3칸  측면2칸의 건물로 기둥 위에는 간략한 공포가 장식하고 있는데, 이 건물은 조선 초기(성종4년인 1473년 중건)의 주심포형 건축물로 공포의 살미첨차가 외부로 돌출하여 초기 익공의 모양이 나타나고 있다. 살미첨차에 간략한 장식을 하였으나, 매우 정제되고 아름답게 보인다. 또 해탈문으로 들어가는 계단의 소맷돌에는 삼태극 문양이 선명하여 깊은 품격을 느낄 수 있으며, 한국인이 삼태극을 얼마나 오래전 부터 사용했는지도 알게 하는 구체적인 자료이기도 하다. 해탈문은 도갑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국보 제50호 이다. 

 

다른 유적으로는 미륵전내 석조여래상(보물 제89호), 도갑사 동자상(보물제 1134호), 월출산 중턱에 마애여래좌상(국보 제144호) 도선수미비(보물 제1395호), 수미왕사비(유형문화152호), 오층석탑(유형문화재 제151호), 석조(유형문화재 재150호) 등이 있다. 옛 영화에 비하면 너무도 아쉬운 유적들이다.

 

도갑사를 찾고 그나마 반가웠던 것은 넓은 경내 중심에 중층으로 세워진 장대한 대웅보전 건물이었다. 한국에 불교가 들어와 자리한 삼국시대 이래, 격을 갖춘 절들은 그 어디 할 것 없이 절의 중심에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금당)을 세웠다. 그리고 그 대웅전은 특별히 다른 건축물들과 달리 중층으로 세웠다.

 

중층건물은 내부는 2개층이 트인 통 층이나, 외부에서 보면 2층처럼 보이는 건물로 이는 부처님을 모신 전각은 그냥 단순히 화려하고 큰것으로 그 의미를 다한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찰의 다른 전각들 보다 당연히 그 규모가 크기도 하였지만, 굳이 중층으로 지어 부처님을 모신 곳이 바로 불국토임을 보이고자 한 때문이다. 그런데 불교가 탄압받고, 전란으로 소실된 이후, 조선시대에 지어진 대부분의 절들은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을 단층으로 지어 훼손 되기 전 모습에서 훨씬 퇴보하고 말았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 중기 이후 한국의 절들이 따르는 보편적인 경향이 되어서, 대웅전이 단층으로 정착되었고, 이제는 스님들 조차도 대웅전을 중층으로 지어야 한다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말았다. 그런데 도갑사의 대웅보전은 1974년 화재로 소실 된 후 1980년대 중건했음에도 단층이 아닌 중층으로 건립하여, 부처님을 모신 전각으로 보기 드물게 크고 높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대웅보전을 중층으로 세우고자 마음을 낸 스님의 원력이 무척이나 컸다는 생각에 한국의 전통사찰건축을 연구하고 복원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필자로서는 참으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은지 얼마되지 않아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는, 당연히 도갑사의 중심건물로 문화재가 될 것이다.

 

유난히도 더운 여름날 먼 남쪽지방으로 길을 떠나서 만난 도갑사의 이모저모가 정말 좋아서 무더위에 지친 몸이지만 기쁜 마음에 그 피로를 전혀 느끼지 못하였다. 언젠가 다시 시간이 되면, 아름답고 유서깊은 도갑사에서 하루쯤 밤을 새면서 역사와 함께 월출산의 기를 느끼고 싶어지는 절이 도갑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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